조선시대

< 임진왜란 중 '항복한 일본인' 1만명 >

엑칼쌤 2018. 2. 22. 17:34

임진왜란 중 '항복한 일본인' 1만명




1597년(선조 30년) 5월 도원수 권율은 죽도와 부산의 적진에 밀파한 간첩들의 보고를 정리하여 조정에 알린 내용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왜인들의 시름이 큽니다. 항왜(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이미 1만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놓았을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근거립니다.”


이를 보면 “지금 경상우병사가 거느린 항왜만 해도 1000명에 달한다”고 했다. 또 1595년(선조 28년)의 보고서를 보면 “북쪽 변방에 이주시킨 항왜의 숫자가 5000~6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실록>에 등장하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는 42건에 600명에 달한다. 기록된 숫자가 이 정도니 실로 엄청난 수의 왜인이 갖가지 이유로 항복하거나 귀화했음을 알 수 있다.


* “투항왜병 적극 유치하라”


실제로 <선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심상치않은 이름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즉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딱 봐도 일본인들이다.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은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왜인들은 왜 투항했을까. 전쟁이 나자마자 귀화의 길을 택한 김충선 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초기에는 항복한 왜인(항왜)가 없었다.


왜병이 전쟁발발(4월13일)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으로 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명나라가 참전함에 따라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 전쟁 초기 침략자인 왜병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뎐 조선 조정도 사뭇 달라진다.


전쟁 발발 2년 4개월이 지난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가 흥미로운 명령을 내린다.


“조선이 전투에서 이기지도,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항복·귀순하는 왜인들을 거절하고 있다. 옳지않은 처사다. 항복한 왜인이 수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왜군의 군졸 한명이라도 이렇게 앉아서 얻었는데,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1593년 1월 조명연합군과 왜군의 평양성전투를 그린 그림. 왜군이 함구문을 통해 도망가는 모습이다.


* 힘들고 배고파 이탈한 왜인들


왜인들은 왜 조선에 투항했을까. 1594년(선조 27년) 4월17일 접대도감 이덕형의 언급이 의미심장하다.


“왜적들의 한끼 식사가 작은 종지 하나의 밥이 전부인데, 그나마 절반이 껍질째였습니다. 일은 고달프고 배가 고파 항복하려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선조실록>)


왜병은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장기주둔에 따른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95년(선조 28년) 비변사가 항복한 왜인인 조사랑(助四郞)과 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에게 술과 안주를 먹이자 ‘항복한 이유’를 술술 털어놓았다.


“우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휘하에서 예속된 장졸들인데 여러 장수들의 진영을 오가며 감당해야 하는 수자리(전방 수비)가 너무 괴롭던 차에 조선이 후히 대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선조실록>)


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들일수록 귀순·투항자가 많았다. 즉 1597년(선조 30년)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다. 왜장 가운데는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포악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선조실록>을 보면 그 평가가 맞는듯 하다.


투항자들은 “가혹한 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군졸이 하루에 100명에 이른다”고 알렸다.


* “항왜들이 더 잘싸운다”


항복한 왜인들을 후대한 조선조정의 ‘항왜 정책’도 한몫 단단히 했다. 조선조정은 투항한 왜인에게 첨지(정3품 무관), 동지(삼군부의 종2품) 등의 고위관직을 내렸다.


선조는 ‘천하에 믿을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왜인들’이라며 항왜의 유치에 반대했던 신료들을 질타하기도 했다.


“자네들은 투항한 왜병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과하게 대접해준다고 불평해왔다. 원래 과인이 항왜를 많이 유치하려 했지만 자네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항왜들만이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다.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죽을 힘을 다해 적병을 죽이고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운다. 이들에게 모두 당상관(정3품 이상)의 직책을 내리고, 그 다음은 은(銀)을 상급으로 하사하라.”(<선조실록> 1597년 8월)


선조는 “항왜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꾸짖고 있다.


* ‘그 항왜는 특별한 자다. 후대하라.’


선조의 말마따나 ‘제 몸 돌보지 않고 싸운 항왜들’은 과연 누구인가. 실록(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이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바로 여여문(呂汝文)일 것이다.


사실 여여문이 어떤 경로로 항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1595년(선조 28년) <선조실록>을 보면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인다.


“어제 과인이 항왜(降倭·항복한 왜인)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제대로 실행했는지 모르겠다. 요새 이 자가 병이 들었다고 하는데, 보통 왜인이 아니니 후히 대우하라.”

그런데 훈련도감은 선조의 특명에 따라 “여여문은 집중치료를 통해 회복됐지만 주상의 하교대로 특별히 더 후대하겠다”고 보고했다.


임금이 앞장서 잘 보살피고, 대접하라는 명을 내릴 정도로 여여문이라는 항왜가 특벌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왜 그랬을까. 무슨 역할이었을까. <선조실록>에 여여문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즉 훈련도감이 이른바 아동대(兒童隊)를 선발하여 검술을 익히게 하고 사수를 양성하게 하는데, 그 책임자가 바로 항왜 여여문이었다.


“(여여문이 훈련시킨) 아동대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렀는데 50여명 중 합격자가 19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뿐이 아니라 조선은 여여문으로부터 일본군의 진법과 전술을 전수받았다. 여여문이 일러준 왜군의 전법은 매우 상세했다.


“왜군은 많은 복병을 좌우에 배치하고, 조총 부대와 창검 부대가 숲속에 흩어져 매복합니다.”(<선조실록> 1596년)


특히 여여문이 귀띔한 “왜병은 쳐들어올 때는 반드시 소수의 군사로 유인하여 적이 매복한 곳에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잇따라 일어나 공격한다”는 왜군의 전법은 칠천량 해전(1597년 8월)에서 입증되었다. 이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법이 말려 단 12척의 전선만 남긴채 사실상 전멸했다.


* ‘우리(我) 조선’이라 한 항왜


그뿐이 아니었다. 여여문은 전쟁터로 달려가 한목숨 바칠 각오가 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저를 요해처로 보내주십시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여여문은 “후한 이익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유인하기는 쉽다”면서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도록 계획을 세우면 아마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다. 과감하게도 ‘적을 이용한 적장 모살 작전’을 아뢴 것이다. 여여문은 이때 조선을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다. 여여문은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한갓 계획만 세우고 의논만 많지만 실행은 적습니다. 날짜만 기다린다면….”


‘항왜’ 여여문이 ‘우리 조선’ 운운하면서 계책을 논하고, 조선군의 약점을 설파했을 때 선조 임금의 반응은 어땠을까. “부끄럽다”는 반성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시행하라. 여여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기도 하다


* 사고여무, 요질기, 염지, 손시로, 조사랑, 노고여문…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서 한몫한 항왜 준사(俊沙)도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이 배로 일본 수군을 격파할 때 장군의 배에는 안골포에서 투항한 항왜 준사가 타고 있었다.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들을 내려다 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지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마다시의 목을 내다걸어 왜적의 사기를 꺾었다. 준사가 지목한 마다시는 왜장인 구루시마 마치후사(來島通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597년(선조 30년) 11월의 정진전투에서도 항왜의 활약이 컸다. 권율 도원수의 장계는 이 전투에서 활약한 항왜의 이름과 벼슬명, 공적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왜적 70명을 죽였습니다. 검첨지(정3품 무관) 사고여무는 왜적의 목을 두 급, 동지(종 2품) 요질기와 첨지 사야가(훗날 김충선)와 염지는 각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항왜 손시로는 탄환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항왜 연시로는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왜기와 창, 칼, 조총 등을 노획했고, 우리나라 포로 100여명을 빼앗았습니다.”


사고여무, 요질기, 사야가, 염지, 손시로, 연시로 등 항왜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에게 첨지와 동지 같은 고위직의 벼슬을 내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1597년(선조 30년) 남원성 전투에도 ‘남원 주변의 부녀자는 물론 항왜들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다.(<선조실록>)


또 1597년(선조 30년) 9월21일 경상도 상주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던 왜병의 후미를 공격한 조선군 중에는 산록고, 사고소 등 항왜가 15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1597년(선조 30년) 2월 김응서의 가덕도 싸움과. 1598년(선조 31년) 10월 사천 싸움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상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첨지 기오비기와 동지 사기소 등은 1598년 4월 거창의 왜인 17명을 유인한 공로로 두둑한 상급을 받았다.


* 왜장 암살을 자청한 항왜


항왜 가운데는 여여문처럼 왜장 암살모의계획을 주장한 이도 심심찮게 보인다. 이 가운데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을 자청한 항왜들이 있다.


즉 1595년(선조 28년) 2월 경상좌병사 고언백이 병사들과 무술을 겨루고 있을 때 항왜 주질지와 학사이가 쫓아왔다. 두사람이 은밀하게 고한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우린 본국(일본)을 등졌으니 우린 이미 조선시람입니다. 조선인으로 밥도 먹고 옷도 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적의 괴수(가토 기요마사)를 베어야 합니다.”


암살계획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청정(가토)은 다른 장수와 만날 때 거느리는 군사가 10여명에 불과합니다. 매번 단기필마로 와서 술을 마시고 돌아갑니다. 사냥할 때도 단기로 뒤를 따라가 혼자 높은 봉우리에 서있는 일이 많습니다. 이때 일본인 중 내응하고 있는 자와 살해를 도모한다면 손바닥 뒤집듯 쉬울 것입니다. 사또(고언백)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고언백은 이들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자 둘은 더욱 치밀한 계획까지 일러주었다.


“사또가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항복한 구질기의 종형(고로비)이 청정(가토)의 가장 가까운 군관으로 있다습니다. 고로비 또한 조선 진영으로 귀순하려 합니다. 그 사람과 내응하면 성사될 겁니다. 어떠십니까.”


그러나 이 가토 암살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명나라와 왜와의 강화 계획이 틀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고언백은 왜군진영의 내응자인 고로비에게 “강화교섭을 위해 명나라 사신이 내려올 것이니 (가토의 암살계획은) 없었던 일로 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그러나 고로비는 “일본이 명나라와 강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크게 화를 냈다. 고언백과 조선조정은 혹여 고로비가 경거망동하여 가토 기요마사 암살계획을 실행할까봐 전전긍긍했다. 화해분위기를 망칠까봐 두려워 한 것이다.(<선조실록> 1595년 3월)


* 김충선,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


조선에 귀화하거나 항복한 일본인들은 전투와 정탐 외에도 기술전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은 항왜들에게 총검을 주조하고 염초를 굽는 방법을 배웠다. 조총의 사격술과 검술도 익혔다. “항복한 왜인을 죽여봐야 무슨 이익이냐. 염초 굽는 법을 배우는 편이 낫다”는 선조의 언급(1593년)이 이를 뒷받침한다. 선조는 “왜적이라 하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적국의 기술이 곧 우리의 기술이다”라 강조했다.(1594년 7월) 이렇게 적극적인 ‘항왜 유치 정책’이 주효했던 것일까.


1597년(선조 30년) 1월 “김응서 휘하의 항왜 중 조총 기술자가 많으니 상경시켜 배우자”는 건의에 선조는 자신있게 밝힌다.


“이제 조선에도 조총을 잘 만드는 자가 많다. 상경시킬 필요가 없다.”


항왜 가운데는 김충선 뿐 아니라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처럼 조선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이들도 있었다. 여여문이나 사백구 등 처럼 실록에 이름자를 남긴 이들은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