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라가야 왕성' 실체 첫 확인 >
'아라가야 왕성' 실체 첫 확인
아라가야는 5세기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신라와 동맹을 맺은 대가야가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뭉치는 연맹 국가들이 생겼다. 아라가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를 여는 등 세력을 과시하며 전성기를 구가한 건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이었다. 아라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쟁투 속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라를 이어갔으나 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물리친 신라가 가야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펼치면서 끝내 신라에 투항했다.
가야리 일대가 아라가야의 왕성일 것이라는 짐작은 문헌을 기초로 일찍부터 있었지만 왕성 추정지에 대한 발굴은 지난 4월 우연히 그 흔적이 드러나면서 처음으로 진행됐다.
경남 함안 가야리의 아라가야 왕성 추정지에 대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높이 8.5m, 폭 20∼40m의 당대 최대 규모의 토성이 확인됐다. 이만 한 규모의 토성은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막강한 정치권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
발굴을 진행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토성의 높이는 확인된 것만 8.5m에 달한다.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부분까지 합치면 10m 정도는 될 것이라는 연구소의 예상이다. 초기 백제의 도성 혹은 방어용 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높이 6m)보다 2m 이상 높고,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가야 권역의 성산토성(4.1m), 순지리토성(4m)의 2배가 넘는 규모다. 토성의 상부 폭은 20∼40m였다.
암석을 파서 조성한 긴 네모꼴의 수혈(사진 위)과 의례 공간에 주로 발굴되는 통형기대. |
토성 내부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과 함께 건물터, 구덩이 등이 발견됐다. 건물터는 현재로선 정확한 형태와 규모를 추정하기 어렵지만, 고상건물지(기둥을 세워 높여 지은 건물 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암석을 파서 조성한 구덩이는 긴네모꼴로, 용도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구덩이 안에서 부뚜막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고, 주로 고분 등 의례 공간에서 나오는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 그릇받침)가 출토돼 특수한 목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확인된 토성은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권력의 존재를 보여 주는 증거다. 아라가야가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였던 정치·경제적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최고지배층의 생활문화와 가양의 토목기술, 방어체계, 대내외 교섭 등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