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 >

엑칼쌤 2018. 11. 1. 20:05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이상설은 1894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의정부 참찬(參贊)이던 그는 1905년 ‘을사 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던지고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섰다. 이듬해 조국을 떠난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만주에 도착한 뒤 한국 최초의 민족 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수학·지리 등 근대적인 신학문을 가르치는 항일 교육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바로 다음 해 문을 닫아야 했다.


물론 이상설은 서전서숙의 설립자보다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이위종과 함께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 특사는 각국 위원들에게 대한제국 존립의 정당성을 호소했지만 각자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열강들은 이 피맺힌 외침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일제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를 사칭했다”는 죄목을 들어 궐석재판을 열고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상설은 ‘사형수’의 신분이 된 후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연해주에서 이범윤·유인석 등과 13도 의군을 결성해 의병 운동에 불을 지폈고 1914년에는 한일 병합 이후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선임됐다. 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신한혁명당을 조직했다. 이렇게 12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를 돌며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다 우수리스크(당시 지명은 니콜리스크)에서 병을 얻고 순국했다.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지 꼭 10년 만이었다. 이상설이 대한 독립운동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는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가 남긴 말을 보면 곧바로 드러난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을 앞둔 뤼순 감옥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그는 세계정세에 밝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사람”이라며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명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고 존경 어린 헌사를 바쳤다.


조국 해방의 빛줄기를 미처 보지 못하고 눈 감았던 이상설의 시신은 남아 있지 않지만 후손들이 1966년 수이푼강변의 모래 한 줌을 퍼 와 충북 진천의 숭렬사 뒤에 있는 부인 무덤에 합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