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라 목호의 난 >
탐라 목호의 난
제주 애월 바닷가에 가면 장군을 형상화 한 두개의 석상 가운데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비석에는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애월이 몽골에 맞서고 오랭캐를 없앤 곳’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애월은 삼별초의 몽골 항쟁지이자 이 책의 소재인 목호의 난이 일어난 곳입니다. 비석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두 석상은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과 목호를 토벌한 최영 장군입니다.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비석
목호(牧胡)는 가축을 기르다는 뜻의 목자와 오랑캐 호자를 합친 한자어입니다. 풀이하면 ‘말 키우는 오랑캐’라는 뜻이 됩니다. 고려는 1231년부터 공민왕의 반원 운동이 성공한 1356년까지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1273년에는 제주에서 항거하던 삼별초를 평정한 원나라가 이곳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할령으로 삼습니다. 제주를 중국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이자 말을 키우는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원나라는 그들 전통에 따라 제주를 동아막과 서아막으로 나누고 연 1500명 가량의 군사를 주둔시켰습니다. 제주 목마장은 원 제국의 14개 국립 목장 중 하나로 경영됐습니다. 그 후로 약 80년동안 제주 사람들은 주둔군의 한 형태인 목호와 어울려 살았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이 시기를 “몽골 문화는 제주의 모든 영역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특히 제주어 가운데 말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용어에서 현재도 몽골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언어뿐만 아니라 의상과 실생활에서 쓰이는 용구들에서 80여년간 지속된 원의 지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설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제주는 원래 ‘탐라국’이라는 독립된 나라였습니다. 탐라가 고려의 일개 주로 편입돼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고려 의종 7년인 1153년입니다. 지방관을 파견했지만 고려는 대대로 세습된 탐라의 성주와 왕자의 지위를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려는 탐라를 120년 지배했습니다. 이 기간 직후 원나라가 탐라를 직할령으로 편입해 83년간 지배했습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깁니다. 목호의 난 당시 탐라 사람들은 자신들을 ‘고려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몽골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혹시 자신들을 탐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사실, ‘원 간섭기’나 ‘목호의 난’이라는 명칭은 ‘고려 왕조’의 시각입니다. 우리는 ‘고려 왕조’가 ‘나’와 같은 민족이라고 믿기에 이런 시각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 그 당시 제주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인식은 기록으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국한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을 봅시다. “초창기 목호 세력과 고려의 충돌은 원과 고려 사이에 형성된 긴장 관계의 정도에 따라 전개되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목호 세력은 본국인 원의 지원이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고려에 맞섰는데, 이는 고려 조정이 파견한 관리들의 폭정과 수탈에 반감을 가진 제주 사람들이 목호 세력에 가세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라고 합니다. 당시 제주 사람들이 누구를 더 가깝게 느꼈을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목호의 난은 원나라를 꺾고 등장한 명나라가 고려에 말 2000필을 요구하면서 시작됩니다. 고려는 제주에 명나라에 바칠 말을 보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목호가 이를 거부합니다. 애써 기른 말을 적국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죠.
결국 전쟁이 시작됩니다.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전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최영을 도통사로 삼아 병선 314척, 정예 군사 2만5605명을 보내 제주를 토벌했다는 내용입니다. 홀고탁,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조장홀고손 등이 고려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목호와 고려 군사들만 죽었을까요?
승기를 잡은 고려군은 몽골인의 피가 섞인 자, 변발을 한 자, 목호를 도운 자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토벌했습니다. 이 싸움으로 섬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조선 태조시절 목호의 난을 전해 들은 제주 판관 하담은 자신의 일지에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과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