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

< 백제 위덕왕의 '아버지의 마음' 담은 사리기 >

엑칼쌤 2019. 4. 1. 14:30

백제 위덕왕의 '아버지의 마음' 담은 사리기




‘정유년 2월15일(丁酉年 二月十五日)’. 2007년 10월10일 부여 왕흥사 목탑지를 조사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원들은 숨이 멎었다. 목탑지 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서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제 뚜껑이 보였고, 이 뚜껑을 열어보니 흙탕물 속에서 청동사리함(직경 7.5㎝, 높이 8㎝)을 확인했다. 조사단이 진흙투성이인 사리함의 표면을 닦아내니 ‘丁酉年 二月十五日’ 간지가 새겨져 있는게 아닌가.


조사단원들의 입이 말랐다. 이것은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유적의 연대를 똑똑히 알려주는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더 닦아보니 명문이 계속 보이기 시작했다. 조사단은 무엇보다 ‘백제왕 창(百濟王昌)’이라는 명문 앞에 모두들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백제왕 창’이라면 바로 백제 25대왕인 위덕왕(재위 554~598년)이기 때문이다.


면밀히 명문을 판독해보니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였다. 즉 ‘정유년(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는데 2장이었던 사리가 장례지낼 때 신(神)의 조화로 3장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왕흥사지 사리공 주변에서는 이밖에도 8150여 점 이상의 공양품들이 확인됐는데, 주요 유물들이 보물(제1767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창왕, 즉 위덕왕은 왜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왕흥사를 세웠다는 것일까.


창왕은 태자시절이던 554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라 원정에 나선다.


“(태자인) 여창(餘昌)이 신라 정벌을 계획했다. 그러자 원로대신이 ‘하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화가 미칠 게 두렵습니다’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여창은 ‘늙으셨네요. 어찌 겁을 내시오’하고 출전을 고집했다.”(<일본서기>)



  부여 왕흥사 목탑지에서 수습된 명문 사리장엄구



그러나 태자는 도리어 관산성(옥천)에서 신라군에 의해 포위를 당한다. 이때 아버지인 성왕(재위 523~554년)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그만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는다. 이 전투에서 성왕의 목이 잘리고 최고관등인 좌평 4명과 사졸 2만9600명이 몰살하는 등 참패한다. 태자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 왕위에 올랐는데 그 사람이 바로 창왕, 즉 위덕왕(재위 554~598년)이다. 이 참패는 백제에게, 아니 창왕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죄책감에 시달린 창왕은 “출가해서 불교에 입문하고자 한다”(<일본서기>)고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신하들의 만류로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창왕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잇달아 절을 창건하고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는 등 불교 제의에 힘을 쏟았다. 왕흥사 역시 아버지를 죽이고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렸다는 죄책감에 평생 살아왔던 창왕이 세운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