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의 비밀병기 '쇠뇌' >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의 비밀병기 '쇠뇌'
‘쇠뇌.’ 익숙지 않은 이름일 것이다. ‘노(弩, crossbow)'라고도 한다. 쇠뇌는 활과 비슷하지만 손과 팔의 힘이 아니라 기계적인 힘으로 화살을 발사시키는 무기다. 그래서 성능은 활보다 사격 거리와 정확성, 파괴력이 훨씬 강하다. 원거리 공격 무기다. 쇠뇌는 동서양 여러 나라에서 모든 기원전부터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쇠뇌 여러 점이 발굴됐다. 평안남도 강서군 태성리의 15호 토광묘와 황해도 은파군 갈현리 부조예군 무덤 등 낙랑 유적지에서 초창기 발사장치 등이 나왔다. 중세 유럽에서 사용된 쇠뇌의 일종인 석궁의 사거리가 60m에서 300m 사이였던 데 비해 이보다 수백 년 앞선 신라 시대 우리 조상들은 사거리 1200m의 쇠뇌를 사용했다고 분석한다. 신라가 세계사에서 드물게 1000년 역사를 이어간 바탕에는 이런 비장의 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고종이 묻는다.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000보(1200m)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당 고종이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중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지만 구진천은 끝까지 기술을 다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이러한 쇠뇌를 개량한 팔우노‧수질노‧구궁노‧천균노 등 신종 쇠뇌를 많이 개발했다. 팔우노는 소 여덟 마리가 활시위를 당겼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도 여러 종류의 쇠뇌가 있었으며 여러 개 노가 연속적으로 발사되는 연노법이 도면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때 고구려 영양왕의 동생 건무(建武)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개마무사(鎧馬武士) 500명이 평양성에 쳐들어온 수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퇴각하는 수나라 군사를 전멸시킴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이길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바로 기사와 말의 몸 전체를 갑옷으로 무장한 개마무사였다. 서양에서 고구려 같은 개마무사가 나타난 것은 고구려보다 거의 1000년이나 늦은 십자군 원정 때였다.
수나라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613년과 614년 잇따라 고구려 정복에 재도전한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수나라는 마침내 건국 37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예나 지금이나 안보의 근본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