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총독에 폭탄 던진 강우규 의사 >
조선총독에 폭탄 던진 강우규 의사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3대 조선총독에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아들이 옥중의 아버지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의 한 대목이다. 2일 의거 100주년을 맞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일군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민족 교육 사업에 희사한 강 의사.
강 의사가 민족의식에 눈을 뜬 건 함경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를 만난 뒤로 보인다. 이동휘는 한국인의 정치활동이 봉쇄되자 대중 계몽운동을 펼쳤고, 이에 감화된 강 의사 역시 학교 설립에 나섰다. “홍원군 사립 영명학교는 임원 박치영 강찬구(姜燦九) 신영균 리기수 제씨가 열심 시무한 결과로 학도가 일진(日進)하여 70여 명에 달하였는데…”라는 대한매일신보(1909년 11월 24일자) 보도에서 강찬구가 강 의사다.
교육 사업은 만주에서도 이어졌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분개한 강 의사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1917년에는 중국 길림성 요하현에 신흥동(新興洞)을 개척했다. 유랑 중이던 동포를 끌어들여 마을에는 한두 해만에 100여 호가 자리를 잡았다. 1917년 봄 그는 신흥동에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돼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며 민족의식과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섰다고 한다. 한의업으로 번 수입은 거의 학교 운영에 투자했다. 신흥동은 나중에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주민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벌인 그는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결심했다. 그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자 자식들이 사식을 넣어주기 위해 일제의 감시 속에 친척 일가에게 돈을 빌리려 애쓰는 모습을 동아일보가 자세히 보도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평전에서 “강우규는 재력가였지만 돈을 모두 나라를 위한 일에 썼기 때문에 남겨진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강 의사가 법정에서 설파한 ‘동양평화론’ 역시 새삼 주목된다. 그는 상고취지서에서 “동양 분쟁의 씨를 거두어 평화회의를 성립시켜야 한다. 그리고 동양 3국을 정립(鼎立)케 하여 견고히 자립한 후”라고 썼다. 또 “내가 죽은 뒤에라도 동양평화를 위하여 깊이 생각할지어다. 동양 즉 한중일 삼국이 정립한 동양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라. 내가 죽은 뒤에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독립신문 1920년 5월 6일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