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 삼전도의 굴욕은 인조가 자초한 불행 >

엑칼쌤 2019. 11. 29. 15:01

삼전도의 굴욕은 인조가 자초한 불행




청군을 피해 숨어든 남한산성은 고립무원. 청의 황제 홍타이지(김법래)는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라고 독촉한다. 인조는 공포에 질려 사색이 완연하다.


병자호란은 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바닥에 찧었고, 세자와 대군은 인질이 되어서 끌려갔다. 백성들도 노예로 딸려 가서 모진 고생을 했다. 불과 38년 전 임진왜란을 겪고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결과였다.


조선은 청의 침략을 예측할 수 있었다. 청이 명의 요동 일대를 공격한 전쟁에 파병했기 때문이다. 1627년 청의 침략에 정묘화약도 맺었다. 청은 두만강 너머 지척에서 세력을 키웠다. 조선은 꾸준한 접촉으로 충분한 정보를 수집했다. 나름 군대를 증강했고 화약을 대량 생산했다. 일본으로부터 조총도 수입했다.


그런데 이런 준비 대부분은 한양 인근과 강화도에 집중됐다. 최전선인 의주의 청북방어사 임경업 휘하 병력은 고작 8000명. 반면 호위청과 어영청, 훈련도감 소속 병력을 계속 충원한 한양의 병사는 1만명이 넘었다. 남한산성 역시 수어청 소속 병력이 1만2700명에 달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병력의 부족은 조선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조선이 임진왜란 동안 실질적으로 동원한 병력은 10만명도 안 된다. 전쟁이 끝나고 속오군제를 실행했으나 병력은 좀체 늘지 않았다. 속오군은 오늘날로 치면 향토예비군. 류성룡이 선조에게 건의해 도입됐다. 속오군 병력 대다수는 지방의 농민들로 평상시 농사 짓다가 겨울 농한기에 소집돼 훈련했다.


조선은 정묘호란 직후 속오군의 훈련과 통제를 위해 영장(營將) 제도를 도입했다. 나라 입장에서는 손쉽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집당하는 입장에서는 겨울에도 쉬지 못하고 훈련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랐다. 더욱이 훈련 참가 비용과 장비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했기에 농민들의 반발이 컸다. 머릿수 채우기에 급급해 공노비와 사노비가 합류되다보니 천한 것들과 함께 훈련할 수 없다는 불만도 잇따랐다.


조선은 호패법 실행으로 빈틈을 메울 수 있었다. 군역이 무서워 숨어 있는 인원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패법은 광해군 때는 물론 인조 때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정묘호란 직전 시행된 호패제도는 민심을 달래자는 이유로 아예 폐지됐다.


임진왜란 때는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이 선조 곁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러나 인조의 곁에는 이귀, 김류, 김자점이 있었다. 몇 십 년 사이에 인재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리는 만무하다. 인조가 인재들을 곁에 두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최명길이 눈에 띄지만, 주화파로 비난 받아 운신의 폭은 좁았다.


인사 문제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조에게 있다. 그는 반정공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격 없는 이들을 옆에 뒀다. 그들이 이괄의 난부터 정묘호란까지 보여준 무능함을 지켜보면서도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