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가 김홍도에게 그리게 한 '호렵도' >
정조가 김홍도에게 그리게 한 '호렵도'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 정조(1752~1800)의 다양한 업적 가운데 새로운 그림 주제로 ‘책가도(冊架圖)’와 ‘호렵도(胡獵圖)’를 그리게 한 것은 예술에 끼친 영향이 엄청났다. 책장에 놓인 서책을 중심으로 골동품과 문방구 등을 그린 ‘책가도’는 국왕을 상징하는 어좌 뒤 ‘일월오봉도’ 대신 놓이기도 했다. ‘호렵도’는 이름 그대로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책가도가 ‘문치(文治)’를 뜻한다면 호렵도는 ‘무비(武備·군사관련 준비)’를 강조한 정조의 정치철학을 대변한다. 두 그림 모두 단원 김홍도를 통해 처음 그리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홍도가 그린 책가도와 호렵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함께 지난해 미국 경매에 출품된 김홍도 화풍의 ‘호렵도 팔폭병풍(胡獵圖 八幅屛風)’을 국내로 환수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다고 밝혔다. 병풍 전체 길이 392cm, 높이 154.7cm이 유물은 지난 2020년 9월 크리스티 뉴욕경매에 김홍도파(派) 호렵도로 소개됐고 11억원에 낙찰돼 고국으로 돌아왔다.
김홍도가 호렵도의 대표화가임에도 그의 작품은 조선 후기 실학중심의 농촌경제정책서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호렵도 병풍은 민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반면 이번에 환수한 호렵도는 웅장한 산수 표현과 정교한 인물표현 등이 수준 높은 궁중화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조선 시대 호렵도의 시작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서 가치가 높다. 작품을 분석한 정병모 경주대 초빙교수는 “정조 때, 청나라 황제의 가을사냥 장면을 김홍도 화풍으로 그린 궁중화원의 그림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호렵도 중 예술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이라며 “북학 정책 속에서 자존의식을 지키고자 한 정조 대 외래문화의 수용태도, 국방의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도 크다”고 평가했다.
오랑캐라 낮춰 부르는 ‘호(胡)’자를 써가며 굳이 청나라 황제의 사냥 그림을 그리게 한 이면에는 이처럼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정조의 생각이 반영됐다.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연이어 겪은 조선에서는 청을 배척하는 의식이 컸다. 18세기 후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청의 신문물이 유입되자 쇄국정치 만을 고집할 수 없는 노릇이 됐다. 홍대용·박제가·박지원 등 젊은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생겨난 북학파(北學派)의 의견을 수용한 정조는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펼쳤다. 오랑캐 나라를 증오하면서도 청의 문화를 배울 수밖에 없는 복합적인 상황을 담은 것이 바로 ‘호렵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