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두 왕의 시선 >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두 왕의 시선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1762년 윤5월 13일 창덕궁은 말 그대로 살얼음판이었다.
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는 아들을 서인으로 만들었고 뒤주에 가뒀다. 마흔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지만 왕은 매몰찼다. 더위가 한창이었을 계절, 세자는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숨졌다.
그해 관례를 치르는 사도세자에게 쓴 글에는 '뜻을 원대하게 세우고 사람들을 관대하게 부리고 공평한 마음으로 똑같이 대하고 현명하고 유능한 자에게 일을 맡겨라"고 돼 있다.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1719∼1728)가 요절한 뒤 영조가 어린 세자에게 걸었던 기대, 공부에 싫증을 느낀 세자에 실망한 모습 등을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간찰(簡札·편지)에는 조부인 숙종(재위 1674∼1720)의 능침인 명릉(明陵)을 한 번도 참배한 적이 없다는 점을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영조는 해마다 명릉을 찾았으나 사도세자는 22세가 되어서야 함께 갔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사이에서 세손(훗날 정조)이 태어나고 두각을 드러내자 영조는 세자가 아닌 세손에게 지극한 관심을 쏟으며 훈계의 글을 써주기도 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에는 '폐세자반교문'(廢世子頒敎文)을 친히 쓰고 반포하면서 세자를 폐위하고 처분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제시한 점도 눈에 띈다.
사도세자가 숨진 뒤 영조는 장례 절차를 간소하게 하라고 명했고,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제문에서도 세자의 잘못을 기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776년 3월 10일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정조는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고 공표하며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는 데 몰두한다.
추숭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을 뜻한다.
영조에게 임오화변과 관련한 기록을 없애달라고 간청하고,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는 등의 추숭 과정을 다양한 기록으로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