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입 베어 물면 설탕 꿀 가득. 호떡 >
한 입 베어 물면 설탕 꿀 가득. 호떡
호떡이다. 호떡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중국, 한국까지 전파된 음식이다.
호떡의 호(胡)는 북방민족을 의미한다. 중국인들은 흉노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아랍인을 '호인'이라고 불렀다. 즉 호떡은 호인들이 즐겨먹는 떡이라는 뜻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과거부터 쌀보다 밀이 잘 자라 흉노족들은 밀을 반죽해 화덕에 굽거나 튀겨먹었다. 이후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생긴 시기에 흉노를 통해 밀가루 음식이 전해졌다. 이러한 밀가루 음식을 호병 또는 후삥이라 불리며 호떡의 조상 격인 음식이 되었다.


당시 호병은 길거리 간식이 아닌 왕실과 귀족이 먹는 귀한 음식으로 취급됐다.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서 수행할 때 쓴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입춘을 기념해 황제가 절에 특별선물로 호떡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나라 '안녹산의 난' 때 피난길에 오른 양귀비가 죽기 전에 먹은 마지막 음식이 호떡이었다고 한다. 이때의 호떡은 고기와 채소가 들어가 현재의 호떡과는 모습이 달랐다. 이후 조선후기 청나라 일반 상인들에게 판매되며 '소병'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과거 호떡집들은 장사가 잘 돼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이 때문에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속담도 생겼다. 보통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사람이 많아 가게에 장사가 잘 된다'란 의미로 사용한다.
호떡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이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졌는데 이때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자장면, 만두, 호떡 등과 같은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병' 안에 조청이나 꿀, 흑설탕을 넣어 팔았다. 호떡은 인천 제물포에서 판매하기 시작해, 화교들이 모인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주변이나 종로거리로 퍼지면서 우리나라 대표간식으로 자리잡았다.
1920년대 우리나라에 대형건설 현장이 늘며 '쿠리'라고 부르는 중국 노동자들이 한국으로 대거 넘어왔다. 가난한 이들에게 호떡은 값싼 대용식으로 사랑받았다. 이때의 호떡은 기름에 지지는 방식이 아닌 화덕에 구워내는 방식으로 호ㄸ?ㄱ을 만들었다. 1970년대 식용유의 등장으로 기름에 지지는 방식으로 조리법이 바뀌었다.
호떡은 전쟁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음식이다. 한국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이 호떡 안에 여러 종류의 곡물씨앗을 넣어 먹었다. 그것이 유래가 돼 1980년대 후반 남포동에서 '씨앗호떡'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