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고려시대

< 처인성 전투 >

엑칼쌤 2025. 6. 15. 13:00

처인성 전투

 

처인성은 천안이나 청주, 충주로 나가는 주 교통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수원에서 평택으로 가거나, 용인에서 안성으로 가는 간선축에서도 벗어나 있다. 단지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부수적인 교통로에 불과하다. 따라서 몽골 침입 당시 난을 피할, 최소한의 방어에만 적합한 성이었다.

고려와 달리 이런 이유로 조선은 처인성을 활용하지 않았다. 약 3리의 성벽이 남겨져 있었으나, 성곽으로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기록이 다수다. 단지 군대 창고로 활용했다. 옛 지도에서도 처인성의 존재를 찾기 힘들다.
몽골의 2차 침입 때도 비슷했으리라. 성안에 모인 백성의 규모는 얼마였을까. 김윤후는 진위에 있던, 사찰이 운영하는 초소의 일종인 '백현원' 소속이었다. 전란이 나자 처인성으로 피난해 왔다가 성에 모여든 백성과 힘을 합쳐 몽골군과 싸우지 않았을까. 모든 게 미스터리다.
 

처인성으로 살리타가 끌고 온 병력 규모 또한 미상이다. 대구 팔공산까지 쳐들어가, 거란의 침입을 불심으로 막아보겠다며 76년간 만든 초조대장경과 이를 보관하던 부인사(符仁寺)까지 불태웠으니, 분명 완전체의 군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살리타는 왜 이 주먹만 한 성곽을 공격했을까? 천대받는 부곡민 일색이어서, 재물이 많다거나 주요 인물이 있어 공격의 가치가 높지 않았음이 분명한데 말이다.

 
전쟁 양상도 의문투성이다. 3m 높이의 성곽에 1~2m 높이 목책을 세웠으니, 당시 몽골의 전투력으로 함락은 식은 죽 먹기 아니었을까. 아무리 방어가 철저하다 해도 가공할 기마부대를 보유한 군대이지 않았는가.

 

살리타가 김윤후의 화살 하나에 목숨을 잃는다. 당시 몽골군은 총사령관이 죽으면 무조건 철수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강토를 보전하게 되었으니, 화살 하나가 최소 수만 백성의 목숨을 살린 셈이다. 똘똘 뭉친 민중이 일궈낸 위대한 승리였다.

 

* 김윤후의 생각

 
무신 세력에게 강화도는 그야말로 '엘도라도'였다. 들판이 넓어 식량이 풍족했고, 사나운 바닷물은 천혜의 해자였다. 뭍의 백성이야 도륙당하건 말건 이들과는 별개였다. 호사로운 생활과 향락에 젖는다. 이처럼 무위도식하는 집단에게도 처인성 전투는 인상적이었나보다.
 
이런 상황은 21년 후인 1253년에도 재현된다. 몽골 5차 침입 때다. 장수가 된 김윤후가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전쟁을 독려, 충주 남산성에서 70여 일을 버텨낸다. 농민과 천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충주 역시 이듬해 국원경으로 격이 올라간다. 김윤후의 벼슬도 높아진다. 이런 항전에도 고려는 왕자를 보내 항복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고려와 몽골은 총 9차례, 1231∼1259년까지 29년간 전쟁을 치른다. 모든 전쟁이 극악했겠지만 6차 전쟁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때 피해를 <고려사>는 포로 20만 6800명에 살육당한 자는 셀 수 없다고 기록한다. 참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