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 수만 병력 12km 앞 고개서 사라졌다 >

엑칼쌤 2021. 1. 30. 09:17

수만 병력 12km 앞 고개서 사라졌다 

 

인조는 다시 혹독한 겨울을 보낸다. 또 한성을 비운다. 세 번째다. 1636년 12월(이하 음력),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1627년 1월 정묘호란 때 강화로 두 번째 파천을 한다. 그리고 병자호란. 청군은 공성전을 피하며 한성으로 들이닥친다. 이 교수는 "청군이 상인으로 위장하는 기만술로 압록강을 건너 길을 뚫은 뒤, 조선군이 지키는 성과 대치할 최소의 병력만 남기고 한성으로 속도를 냈다"고 설명했다. 13년 전 도주하던 이괄군 일부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에 들어가 조선의 국방 정보를 불었다는 건 이미 밝힌 바 있다.


강화로 가는 길이 청군에 막히자, 인조는 이괄의 도주로와 같은 광희문을 통해 도성을 벗어난다. 광희문은 도성 내 시신을 내보낸 문이다. 시구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을 이용한 왕은 인조가 유일하다. 인조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같은 길을 간 이괄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물들었을 경안역이 지척이다.

 

* 인조, 이괄과 같은 광희문 통해 탈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근왕(勤王)' 명령을 내린다. 근왕은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지 벌써 엿새…빨리 달려와 군부의 위급함을 구하게 하라(인조실록 1636년 12월 19일).’ 비변사를 통해 경상감사 심연이 납서(蠟書·밀로 봉한 비밀문서)를 받는다. ‘나는 지혜가 부족하고 어질지 못하여 너희 사민을 저버린 바가 많았도다. 너희는 각자의 지혜와 힘을 모아서…북으로 진군할지어다…이에 교시하노니 잘 생각하고 알아서 행하여 주기를 바라노라(인조실록, 병자호란사).’

 

상관의 ‘알아서 하라’는 말만큼 엄한 게 없다. 심연은 군사를 모은다. 그 수가 4만(연려실기술, 병자일기)이라고도 하고, 8000(조선왕조실록, 병자호란사)이라고도 한다. 3만설(심연 묘비문, 하담파적록)도 있다.

 

심연은 끌어모은 병력을 서둘러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보낸다. 허완(68·경상좌도 병마절도사)과 민영(54·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선세강(61·안동 영장) 등이 앞서 출발했다. 이의배(61·공청도 병마절도사) 등도 합류한다. 심연은 뒤따라가기로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 각지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한 근왕군은, 현역 정예병보다 의병과 속오군이 훨씬 많았다”며 “게다가 보급품이 모자라, 이미 추위와의 싸움에서부터 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 무관 지휘한 문관 도경유, 먼저 줄행랑

 

쌍령전투를 떠오를 수 있는 곳은 정충묘와 이후락이 세운 비석 정도였다. 국수봉 남쪽 곤지암천변에는 허완의 병력이, 대쌍리 쪽에는 민영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귀화한 김충선의 150여 명 병력도 있었던 곳이다.

 

이 경상과 충청의 근왕군은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치른다. 청군의 수가 300이라고 한다. 극적 전개를 위해 최대 편차인 ‘4만 vs 300’ 구도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 숫자 또한 불확실하다. 광주문화원은 남한산성 동문의 청군 본진에서 3000여의 기병이 이때 경안천에 이르렀다고 제시한다.

 

근왕군이 쌍령에 도착한 1636년 12월 30일에도 폭설이 내렸다. 대쌍고개만 넘으면 경안역이요, 남한산성까지는 30리(12㎞) 거리다. 하지만 근왕군을 지휘하는 종사관 도경유는 한시바삐 남한산성에 가야한다며 장수들을 채근했다. 도경유는 이미 ‘지옥의 행군’에 항의하는 민영의 부관 박충겸을 참수했다(연려실기술·인조실록). 전시 상황인데, 문관이 무관을 지휘했다.

 

“당시 청군은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막고 있었다”며 “영남뿐만 아니라 각지의 근왕군이 남한산성에 발도 붙이지 못 하게 했다”고 했다. 청군은 이미 이 영남 근왕군을 포위하고 있었다(병자일기).

 

공조참의 나만갑은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기록한다. 그의 『병자록』에 따르면 허완은 정예 조총수를 진영 가운데에 집중 배치했다. 진영 바깥쪽이 약해지게 됐다. 화약을 2냥씩(격발 분량이 3발, 5발,10발 등으로 해석이 갈린다) 나눠줬다.

1월 3일 아침. 청군 33명이 국수봉 능선에서 벼락처럼 내려왔다. 선세강은 춥더라도 능선에 진영을 구축하자고 했으나 허완이 묵살하지 않았던가. 때늦은 후회다. 약한 고리인 허완의 최전방 포수들이 난사했다. 화약이 떨어졌다.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용케 알아듣고 돌진. 선세강이 홀로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청군의 목방패에 맞고 떨어졌다. 선세강은 적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쇄도했다. 중상급 포수들은 총 한번 쏘지 못하고 무너졌다. 허완은 세 번이나 부축 받아 말에 오르려 했으나 번번이 떨어져 밟혀 죽었다. 다른 기록에는 자결했다고 한다. 남급의 『병자일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추락해서 죽었다.’

『병자록』은 다시 ‘민영 진영에서 화약이 폭발했다. 청군이 이틈에 돌격하니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사망했다. 적이 죽은 자 옷을 벗기고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마침내 적 300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적는다.

 

승정원일기에는 ’수습한 시신은 100분의 1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길에 버려져서 까마귀나 개가 제멋대로 뜯어 먹어 백골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1637년 4월 7일)‘고 나온다. 대쌍고개를 넘나들며 수많은 청군의 코를 자루에 담아 사기를 높이던 김충선도 결국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조선과 청의 화의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치르자, 김충선은 탄식하며 달성으로 돌아간다(모하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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