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장의 사진이 없었다면-박종철, 이한열 열사
▲7백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다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영정을 앞세우고 학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지금 곱씹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변명이다. 교과서에서 지운다고 역사가 바뀌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기억하고 또 기록한다. 진실의 묵직한 울림을 얄팍한 간계로 막을 수는 없다.
*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그 사진
당시에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단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말이 돼야 말이지.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축소와 은폐에만 급급한 정부에 분노했다. 그날도 연세대 학생들은 교내집회를 마치고 정문 밖을 막 나서던 참이었다. "독재 타도, 전두환 물러가라"란 구호를 몇 번 외치기도 전에 최루탄이 쏟아졌다.
후퇴하던 시위대에서 갑자기 한 학생이 맥없이 쓰러졌다. 뒷머리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쏟아졌고 몸은 심하게 떨렸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 하나가 다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곧이어 네다섯 명이 더 달려와 쓰러진 학생을 부축해 세브란스 병원 쪽으로 옮겼다. 응급실로 실려 가는 중, 쓰러진 학생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 고통에 신음하며 내뱉었다.
▲교내 집회를 마친 연세대 학생들이 정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한열 열사가 마스크를 하고 교문 앞에 나와 있다. 이 사진은 로이터에 임시 사원으로 근무하던 정태원 기자의 동생 정국원 기자가 찍은 것이다. |
▲한 학생이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이한열 열사를 부축해 옮기고 있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 사이에 서 있는 이 두 학생은 연세대에서 열린 고문 종식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가 후 경찰과 충돌했던 5백여 명의 학생 시위대 소속이었다. |
이 한 장의 사진은 당시 정권의 야만적인 행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최루탄을 머리 위로 쏴 시위대를 해산하기보다는 신체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고의로 직격 발사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문제가 된 사격자세를 취한 장면도 정 기자의 사진에 담겼다.
이한열. 용광로의 쇳물처럼 뜨거웠던 청년은 그렇게 식어 우리 가슴 속에 강철이 돼 남았다.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다시 분연히 일어났다. 1987년 6월 10일. 그로부터 17일간, 전국에서 5백만 명 이상이 참가해 2145회의 시위가 열렸다. 그리고 35만발의 최루탄이 발사된 후에야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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