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299

< 안중근이 이토에 총 쏜 현장 >

안중근이 이토에 총 쏜 현장 안 의사 기념관 초입의 안 의사 전신 동상 바로 옆에는 안 의사가 1910년 3월 사형 집행 전 쓴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라는 여덟 글자 편액이 걸려 있었다. ‘국가의 안위가 걱정돼 애를 태운다’는 뜻이다. 구한말 망국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서른살 목숨을 바쳤던 조선 청년은 100여년 뒤 멀쩡한 나라를 위험에 몰아넣은 한국 최고지도자의 행동을 예상이나 했을까. 안 의사의 글씨는 매우 거칠었고 흔들렸다.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과 지린성 차이자거우, 랴오닝성 다롄(뤼순). 안 의사는 그의 동지 우덕순, 조도선 등과 함께 1909년 10월26일 오전 하얼빈에서 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뤼순에서 수사·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일본 근대화를 이끈 이토는..

항일운동 2024.12.24

< 하얼빈역에 울린 을사늑약 원흉을 처단한 총성 3발 >

하얼빈역에 울린 을사늑약 원흉을 처단한 총성 3발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맞아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됐다.1905년,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는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조선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 중이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철저하게 암살을 계획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암살 계획을 세우고, 거사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 도착해 미리 정해..

항일운동 2024.10.26

< 순종의 죽음. 6.10 만세 운동 일으켜 >

순종의 죽음. 6.10 만세 운동 일으켜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숨을 거뒀습니다. 1926년 4월 25일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불과 3년 뒤 쫓겨나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아버지인 고종 때 사실상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지만 공식적인 국권 상실은 순종 때 일어났죠. ‘융희 황제’에서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추락한 채로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서 지낸 세월만 16년이었습니다. 민중은 순종의 죽음으로 조선왕조가 끝났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절감했을 법합니다. 10여만 명의 남녀노소가 돈화문 앞으로 몰려와 통곡하고 상점은 문을 닫고 기생들까지 영업을 삼가는 모습에서 이 정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임종했던 옛 신하 민영찬은 ‘(승하하실 때) 아무런 말씀이 계시지 못하였습니다’..

항일운동 2021.11.13

< 홍범도 장군은 왜 카자흐스탄까지 갔고 왜 이제 돌아왔나? >

홍범도 장군은 왜 카자흐스탄까지 갔고 왜 이제 돌아왔나? 홍 장군은 1868년 8월27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그는 15세에 평양감영 나팔수로 입영했다. 19세에 상관을 폭행한 뒤 황해도 수안군 총령에 있는 종이공장에 취업했다. 그는 이때 동학교도가 돼 착취하는 주인을 살해했다. 그러다 금강산 신계사의 지담대사를 만나 수도생활을 하면서 항일의식을 키우고 글을 익혔다. 홍 장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한 것은 27세 때다. 그는 황해도 서흥의 김수협과 철령에서 왜군 10여명을 죽였다. 의병 활동은 39세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1907년 말 함경·평안도 일대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며 타격을 줬다. 홍 장군은 1919년 북간도에..

항일운동 2021.08.16

< 동영상-'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광복절에 온다 >

동영상-'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광복절에 온다 https://tv.kakao.com/v/421469658 백두산과 만주 벌판을 누비벼 일본군을 토벌한 '독립전쟁의 전설'.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을 피해 1921년 연해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극동지역 침략이 본격화되자, 소련은 한인들의 스파이 활동에 경계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6년 뒤, 소련 정부는 극동지역에서의 한인강제추방을 결정했고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됩니다. 홍 장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37년 강제 이주 당시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얀꾸르간 시르다리아..

항일운동 2021.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