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 닿는 시들 536

< 노을이 붉은 까닭-이월춘 >

노을이 붉은 까닭-이월춘 누가 낙조를 아름답다 하는가구두에 앉은 먼지만큼 하루가 무거워질 때문득 고개를 들어 저렇게 붉은 노을을 본다. 사랑한 만큼 길을 만든다는세상 가장자리들의 말씀을 뿌리며내 얕은 생애의 그림자까지 물들이는 노을. 노을이 붉은 까닭은낮은 곳에 엎드려 밀물지는 사람들에게그리운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이다.서러움조차 수줍은 사람들이 모여서묻어버릴 수 없는 마음들을 나눠갖게 하려고오늘도 저녁산 노을은 붉은 것이다. 바람도 소용없다.잠시 흔들리다 멈추는 물결도 부질없다하나로 뭉쳤던 하루의 힘들이온 하늘 가득 퍼지는 건어둑어둑 골목마다 등불을 내거는저 사람들의 이쁜 얼굴 때문이다.

< 행복한 이유-문보영 >

행복한 이유-윤보영 아직 길 건너 아파트에불 켜진 집이 몇 안 되는이른 시간!그래도 다행인 게내가 이 시간에 갈 곳이 있다는 것그곳에 가면 내가 앉을 책상이 있고펼쳐놓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열정과젊음이 있다는 사실!그러니 오늘 하루를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낼 수밖에매일 그래왔듯지금, 이 순간행복하다고 말할 수밖에.

< 거룩한 식사-황지우 >

거룩한 식사-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먹는 일의 거룩함이여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풀어진 뒷머리를 보라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천사를 만난 날-나태주 >

천사를 만난 날-나태주 갑자기 날씨 쌀쌀해져겨울 외투 꺼내 입고 모자를 쓰고마스크까지 하고서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마주 오던 여자아이 둘그 가운데 한 아이가"안녕하세요?"꾸벅 인사를 한다. 나도 아이를 따라서 "안녕?"하면서 자전거로 비켜 가다가 아무래도 이상하여 뒤를 돌아보았더니 같이 가던 한 아이가 인사한 아이에게 묻는다."누구야? 누군데 인사해?"그 아이 묻는 말에무어라 대답했는지 듣지는 못 했지만 계속해서 페달을 밟으면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오늘 나는 천사 한 사람을 만났다.비록 오늘 속상한 일이 있다 하여도너무 많이는 속상해하지 말아야지.

< 가을의 전갈-나태주 >

가을의 전갈-나태주 만나자가을에 만나자 그 말에쿨렁 가을이 먼저가슴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즈금은 봄의 끝자락아직은 여름도 아닌데 강변 길 산성 길함께 거닐자 그 말에산성 길 굽이굽이강변 길 멀리멀리마음 속으로 들어와펼쳐졌습니다. 그것도 오래전 어여삐헤어진 사람오래 잊혀지지 않고꽃으로 남았던 사람짧은 전갈에.

< 가인을 생각함-나태주 >

가인을 생각함-나태주 길이라도 바람 부는모퉁이길우리는 만났다만나서 서성였다. 둘이서 바람이었고둘이서 먼지였고또 풀잎이었다. 골목이라도 달빛서성이는 골목우리는 서툴게 손을 잡았고서툴게 웃었다. 그리고는 서로의 눈을들여다보며 눈물글썽이다가 헤어졌다. 끝태 우리는바람이었고 먼지였고또 다시 달빛이었다.

< 백지 상태-황유원 >

백지 상태-황유원 꿈에 백발이 되었다 머릿속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리 위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서 머릿속엔 아직 눈이 내리나보다 눈보라가 몰아쳐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나보다 보이지 않으면 좋다 아무 데로나 가도 상관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면 찍힌 발자국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이제 나는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거기서 뒤돌아본 강 위론 아직 눈이 내리는 듯하고 이제 저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가끔 눈부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 백지를 보여준다 내가 쓴 거라고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졌다고

< 새해 아침의 당부-나태주 >

새해 아침의 당부-나태주 올해도 잘 지내기 바란다 내가 날마다 너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너를 위해 부탁하니 올해도 모든 일 잘 될 거야 다만 너는 흐트러짐 없이 또박또박 걸어서 앞으로 앞으로 가기만 하면 돼 분명 네 앞에 푸른 풀밭이 열리고 드넓은 들판이 기다려줄 거야 다만 너는 그 풀밭 그 들판 사이로 난 길을 천천히 걸어가기만 하면 돼 의심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네가 가는 길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네가 함께 가줄 것을 믿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