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 51

< 북한의 군대 조직, 조선 인민군 >

북한의 군대 조직, 조선 인민군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 각지에서는 아래로부터 자발적인 치안조직과 군사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치안확보가 우선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과 소련군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치안조직이나 군사단체를 용인하지 않았다. 남한의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그대로 부활시킨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군사령부는 1945년 10월 12일 북한의 모든 무장단체들을 해체해 이들을 각 지방인민위원회 산하의 새로운 보안대로 조직했다. 치안 다음은 군대였다. 북한에서도 1945년 말부터 구체적으로 군대의 창설을 준비했다. 북조선5도행정국(소련 군정의 중앙행정기관)은 군사담당 부서로 보안국을 설치했다. 보안국 중심으로 육·해·공군의 모체가 되는 각종 보..

해방기 2023.08.19

< 소련軍 들어오자 시내에는 공포. 강간·약탈에 총살 >

소련軍 들어오자 시내에는 공포. 강간·약탈에 총살 ◇함석헌 “소련군의 약탈, 강간...온 시내가 공포”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인 함석헌(1901~1989)은 집 앞 채마밭에서 거름을 주다 해방을 맞았다.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조직된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에서 문교부장을 맡아 일하던 1945년 9월 말 신의주에 소련군이 들어왔다. ‘소련군이 들어오자 온 시내는 공포 기분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다음은 여자 문제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함석헌이 자신이 내던 월간지 ‘씨알의 소리’(1971년 ·11월)에 쓴 ‘내가 겪은 신의주학생사건’에 나온다. 소련군이 포고문에 썼다는 ‘..

해방기 2021.09.02

< 미군정은 점령군? 해방군? >

미군정은 점령군? 해방군? 일본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패했다. 소련이 빠르게 움직였다. 소련은 대(對)일본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한반도에서 자기 몫을 요구했다. 미국과 소련은 협상 끝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한을 분할 점령했다. 하지(John R. Hodge) 사령관을 비롯한 미군정(美軍政) 요원들은 미 제24군단과 함께 1945년 9월8일 인천에 상륙했다. 이들은 9월9일 서울에 있던 조선총독부에서 일본군과 항복문서조인식을 열었다. 하지 사령관이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미군정이 시작됐다. 군정이란 좁은 의미로는 교전국 일방의 군대가 상대국에 진주한 후 피점령국 권력을 배제하고 자국 고유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로는 군사적·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민의 생명, 재..

해방기 2021.07.11

< 김구 일행 환영하는 광복군 >

김구 일행 환영하는 광복군 태극기를 든 한국광복군 대원들이 1945년 11월 5일 중국 상하이 장완비행장에 도열해 충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 직후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 통수권자로서 한국광복군을 사열하는 희귀 사진은 그해 말 발행된 중국 잡지 ‘승리’(勝利) 제11호에 실렸다.

해방기 2021.02.28

< '권력중앙' 먼저 형성한 김일성 vs 美견제로 뒤늦게 귀국한 이승만 >

'권력중앙' 먼저 형성한 김일성 vs 美견제로 뒤늦게 귀국한 이승만 북에서는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이 세운 계획표에 따라 극동러시아의 소련군에서 훈련을 받던 김일성 소련 대위가 귀국해 빠르게 권력중앙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모스크바의정서가 발표된 시점에 북에서는 이미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중앙이 형성돼 있었다. 반면에, 남에서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이승만이 미국 정부의 견제로 뒤늦게 귀국해 정치세력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의정서가 발표된 시점에 남은 북에서 볼 수 있는 단일 지도자 중심의 권력중앙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1. 논점 1 소련에서의 김일성 행적은 어떤 의미를 가졌나.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왼쪽에서 두 번째). [동아DB] 여기서 ..

해방기 2020.12.13

< 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직접' 통치했다 >

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직접' 통치했다 * 소련점령군의 북한 통치는 간접통치였나 직접통치였나. 소련은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훗날에도 자신이 북한을 점령하던 시기에 모든 것을 조선인에게 맡겨 조선인에 의한 통치가 실시됐다고 자랑했다. 특히 미국의 남한점령정책과 비교해, "미국은 남한을 직접통치했지만 우리는 북한에 자율권을 주었다"고 부연하기도 했다. 이 주제에 관해, 결코 친소적이지도 친북적이지도 않은 객관적 연구자들도 "미국은 남한에서 직접통치를 했으나 소련은 북한에서 간접통치를 했다"는 결론을 제시하곤 했다. 미국의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들은 "소련의 북한점령정책은 소련의 동유럽점령정책과 많이 달랐다. 소련이 동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강압 통치를 한 데 비해 북한..

해방기 2020.10.03

< 1947년 이승만 귀국 현장에 나온 김구 >

1947년 이승만 귀국 현장에 나온 김구 1947년 4월 21일 김포 비행장. 이승만 전 대통령이 4개월간의 도미(渡美) 외교를 마치고 귀국했다. 미국을 떠난 이승만 당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는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고 중국에서 장제스(蔣介石)와 회담한 뒤, 장제스가 제공한 특별 군용기 '자강(自强)'호를 타고 들어왔다. 군용기에는 광복 후 중국에 머물고 있던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도 동승했다. 당시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등 임정 요인들이 이들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김포 비행장에 나온 영상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처음 공개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8일 다큐멘터리 감독 안경호씨가 광복 이후 이승만·김구·김규식 등 정치 지도자의 활동과 반탁(反託) 운동 같은 사회상을 담은 ..

해방기 2020.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