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

< 북한의 군대 조직, 조선 인민군 >

엑칼쌤 2023. 8. 19. 11:59

북한의 군대 조직, 조선 인민군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 각지에서는 아래로부터 자발적인 치안조직과 군사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치안확보가 우선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과 소련군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치안조직이나 군사단체를 용인하지 않았다. 남한의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그대로 부활시킨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군사령부는 1945년 10월 12일 북한의 모든 무장단체들을 해체해 이들을 각 지방인민위원회 산하의 새로운 보안대로 조직했다. 
        
치안 다음은 군대였다. 북한에서도 1945년 말부터 구체적으로 군대의 창설을 준비했다. 북조선5도행정국(소련 군정의 중앙행정기관)은 군사담당 부서로 보안국을 설치했다. 보안국 중심으로 육·해·공군의 모체가 되는 각종 보안기구를 육성하고, 훗날 정규군의 기간이 될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한에서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치안의 골격으로 부활시킨 다음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한 것과 비슷한 행보였다.

 

북한은 당장의 국경 경비를 위해 1946년 초에서 그해 중반까지 38경비보안대와 국경경비대를 창설했다. 한반도의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소집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3월 20일)에 앞서 북한은 토지개혁과 군대창설을 추진함으로써 향후 독립정부의 토대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에서 본격적인 군대조직은 1946년 8월 보안간부훈련소를 개편해 창설한 경보병 사단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인민군 보병부대의 모체다. 창설 초기의 경비대 보안대 보안간부훈련소의 간부는 대부분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 맡았다. 그 이후 본격적인 창군과정이 확대되면서 조선의용군 출신, 고려인 출신, 국내공산주의자들 모두 참여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은 해외의 정치세력 중에서 가장 먼저 입북했다. 그들은 소련군 위수사령부의 부사령관직을 도맡았기 때문에 훗날 인민군 창설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한 셈이었다.

 

반면에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일제 패망 직후 만주에서 조선인 부대를 창군해 조선혁명의 무력기반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것은 소련군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실현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 참여해 국민당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북한에 새로운 정치질서가 형성된 뒤에야 입북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가장 많은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병종부대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인민군 창설과 성장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쥐지는 못했다. 고려인들은 독자적인 조직이나 창군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부분 소련군 신분이었기 때문에 창군사업에 가장 늦게 참여했다.  

 

군대창설의 주도권은 처음에는 소련군사령부에 있었지만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 행정부)가 성립되면서 점차 북한의 정치세력에게 이양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군사담당 부서는 여전히 보안국이었다. 보안국에 대한 행정지휘권은 1947년 2월 22일 '임시'라는 명칭을 떼어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면서 북한의 정치세력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 '김일성 유일체제'의 탄생

 

북한의 인민군에 대해서는 김선호 박사(현대사)가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북한의 인민군 창설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이를 간추려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조선인민군>이란 두툼한 단행본을 내기도 했다. 

 

이 보안국 시기에 향후 북한 정규군의 정치사상 체계의 원형이 출현했다. 하나는 중국군과 소련군의 정치간부 제도를 차용해서 인민군의 문화간부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안국이 북한의 기관·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1945년 11월부터 검열을 통해 반제국주의투쟁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인민들을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으로 구분해 반혁명세력을 군대에서 솎아냈다. 인민군의 인적구성에서 친일 지주 부르조아 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노동자 농민 사무원과 같은 혁명친화적인 계층으로 채운 셈이다. 인민군이 반혁명세력을 솎아낸 것은 남한에서 국방경비대에서 좌익 성향의 장병들을 축출한 숙군사업과 유사하게 군의 정체성을 더욱 좌편향으로 몰아갔다.

 

세 번째는 보안국이 북한지역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의 영도사상을 기관의 지도사상으로 채택하고, 동북항일연군의 혁명전통을 유일한 것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향후에 수립된 김일성 유일체제의 역사적 맹아였다는 게 김선호 박사의 분석이다.

 
당시 북한은 여러 세력이 연합하는 통일전선을 추구했지만, 군대에서만큼은 통일전선이 아니라 노동당 중심의 단일조직으로 구축해갔다. 인민군은 '조선로동당 규약'에 분명히 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라고 명시돼 있다. 국가의 군대인 우리 국군과는 제도적 위상이 다르다.  
 
조선인민군의 창설은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입법부)와 북조선인민위원회(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입법부의 입법절차를 거쳐 행정부가 집행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그해 5월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개편해 조선인민집단군총사령부를 창설했다. 이 시기에 인민군은 노동당에 비해 더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소위 반제반봉건투쟁을 전개했다. 군을 앞장세우고 군을 중시하는 선군(先軍)정치의 전통은 이미 인민군 태동기에 발아한 셈이다. 북한의 선군정치는 김정일 시대는 물론 지금의 김정은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7년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북은 본격적으로 단독정부를 추진했다. 그 중대한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1948년 2월 8일 공식적인 조선인민군의 창설이었다. 인민군은 전체 한반도에서 조직된 최초의 무력조직이었다. 이날이 북한의 건군절, 곧 인민군 창설일이 됐다. 최초의 인민군 사령관은 최용건, 부사령관은 김책이었다. 한국전쟁을 개전한 1950년에는 김일성이 총사령관, 최용건이 부사령관이었다.

 

참고로 북한의 건군절은 한동안은 4월 25일이었다. 1978년 김일성은 자신이 1932년 항일 빨치산 부대를 조직한 4월 25일이 진짜 조선인민군 창설일이라면서 바꿨다. 그러다가 김정은이 다시 2월 8일로 환원했다. 

 

이 시기의 인민군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창군이념의 정립이었다. 북한은 인민군의 창군이념에서 조선의용군이나 고려인 또는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이나 무장투쟁 역사는 배제하고 김일성의 항일운동과 항일유격대로 단일화했다.

 

당시의 북조선로동당 지도부는 1948년 3월 이후 각 정치세력이 분점하고 있었지만, 인민군에서는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창군이념을 김일성이 독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훗날 북한이란 국가가 김일성 유일체제로 귀결되는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었다.

 
* 두 개의 군대... 일촉즉발 위기에 놓인 한반도
 
 
창군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민족 전체의 진짜 심각한 문제는 시시각각 전쟁으로 다가선다는 점이었다. 북한은 정부수립 이후에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국토완정론(國土完征)을 주장하면서 지속적으로 인민군 확군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고 중국공산당이 만주를 최종적으로 점령하자 북한은 확군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1950년 6월 당시 인민군은 7개 정규 보병사단, 3개 예비 보병사단, 1개 기계화여단(탱크여단), 해군, 항공부대(비행사단), 그리고 직속부대를 보유한 공격형 정규군으로 완성됐다. 공격형 정규군이 완성된 가장 큰 무장의 토대는 철수하는 소련군이 놓고 간 잉여무기였고, 인력 확충과 전투력 증강의 가장 큰 전기는 만주조선인 부대의 입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