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고려시대 163

< 최우의 강화 천도 >

최우의 강화 천도 몽골 침입 이듬해(1232년) 고려 정부는 전격적으로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로 옮겼다. 강화로의 수도 이전은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1249)가 주도했다.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고려사절요’는 ‘경도(京都, 개성)에는 호수(戶數)가 10만에 이르고, 단청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인정이 향토를 편안히 여겨 옮기기를 어렵게 여겼다’라고 강화 천도에 반대하는 여론이 많았음을 분명히 밝혔다. 반대하다가 목이 날아간 대신이 여럿이었다. 최씨 무인 세력의 위세에 눌려 임금조차 어쩌지를 못했다. 도읍을 강화로 이전하는 사업은 급물살을 탔다. * 강화 신도시는 개성의 판박이 강화도 궁궐 조성 사업에는 군대를 동원했다. 궁궐의 전각이며, 새로 지은 사찰 등이 개성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

< 처인성 전투 >

처인성 전투 처인성은 천안이나 청주, 충주로 나가는 주 교통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수원에서 평택으로 가거나, 용인에서 안성으로 가는 간선축에서도 벗어나 있다. 단지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부수적인 교통로에 불과하다. 따라서 몽골 침입 당시 난을 피할, 최소한의 방어에만 적합한 성이었다.고려와 달리 이런 이유로 조선은 처인성을 활용하지 않았다. 약 3리의 성벽이 남겨져 있었으나, 성곽으로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기록이 다수다. 단지 군대 창고로 활용했다. 옛 지도에서도 처인성의 존재를 찾기 힘들다.몽골의 2차 침입 때도 비슷했으리라. 성안에 모인 백성의 규모는 얼마였을까. 김윤후는 진위에 있던, 사찰이 운영하는 초소의 일종인 '백현원' 소속이었다. 전란이 나자 처인성으로 피난해 왔다가 성에 모여든 백성과 힘..

< 용장산성에 서린 삼별초의 투혼 >

용장산성에 서린 삼별초의 투혼 * 삼별초, 끈질긴 저항의 역사 진도 용장산성은 삼별초가 몽골과 장기적인 항쟁을 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진도 북동쪽에 있는 철천산, 상봉, 서낭산, 선황산, 망봉 능선을 따라 높이 4m, 길이 12.75km의 산성은 석성과 토성이 혼합해 있고, 성벽 안쪽을 흙으로 채우는 편축식으로 축성했다. 용장산성이 감싸고 있는 계곡 비탈면에 계단식으로 아홉 개의 석축을 조성하고 그 위에 궁궐과 관아를 세웠다. 지표조사를 토대로 성곽 둘레를 계산하면 성내 면적은 258만 평에 달하고 궁궐은 7,000여 평, 17개의 건물이 있었던 웅장한 규모다. 고려 태조가 창건한 개경 만월대와 유사한 건축구조다. 1270년 삼별초는 몽골에 항복한 고려 개경 정부에 불복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며 관부..

< '국보' 지정된 공주 마곡사 5층 석탑 >

'국보' 지정된 공주 마곡사 5층 석탑 충남 공주 마곡사에 있는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公州 麻谷寺 五層石塔)이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로 지정되었다.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상륜부의 금동보탑공주 마곡사 오층 석탑 전경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후기에 조성된 5층 석탑이다. ‘바람에 닳아서 빛이 난다’는 뜻을 품은 ‘풍마동’(風磨銅)이라고도 불리는 길이 1.8m의 금동보탑을 옥개석 위에 올리는 이른바 ‘탑 위에 탑’을 쌓는 특수한 양식을 갖췄다. 옥개석은 탑신석 위에 놓는 지붕같이 생긴 석재를 의미한다. 금동보탑은 중국 원나라 등에서 유행했던 불탑양식이다. 이에 대해 국가유산청은 “제작기법이 정교하고 기술적,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탑 중 유일한 것으로, 당시 불교문화의 국제적인..

< 전주 서고산성, 발굴·정비 사업 추진 >

전주 서고산성, 발굴·정비 사업 추진  전주시 효자동 일원의 황방산(서고산)에 위치한 서고산성이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기념물)으로 지정고시됐다.전주 서부지역의 방어 기능을 담당했던 서고산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으로 기록됐다. 이후 1970년대부터 2017년까지 3차례의 지표조사가 이뤄지면서 개략적인 현황만 파악된 상태였다.전주 황방산 서고산성 조사 지역. 이에 시와 전북도는 지난 2019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총 4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를 실시,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축조된 토축성벽과 통일신라시대에 개축된 석축 성벽, 그리고 삼국시대~후백제 시기 건물지 등을 확인했다.삼국시대 토축 성벽의 경우 산사면을 ‘L’자형 또는 계단식으로 굴착한 후 점토와 석재..

< 양주 대모산성에서 목간 4점 또 출토 >

양주 대모산성에서 목간 4점 또 출토 임진강과 한강 유역을 잇는 길목에 자리한 경기 양주 대모산성에서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이 추가로 나왔다.지난해 궁예(?∼918)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목간이 발견된 곳에서 고대 문자 자료가 또 확인되면서 향후 연구가 주목된다.양주 대모산성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물을 모으기 위해 만든 집수(集水) 시설에서 목간 총 4점이 출토됐다.성안 집수 시설에서 목간이 나온 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양주 대모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왼쪽은 적외선 촬영본, 오른쪽은 실제 유물 모습 돌을 쌓아 원형으로 만든 이 시설에서는 '정개 3년 병자 4월 9일'(政開三年丙子四月九日) 등의 글자와 사람 그림이 남아있는 목간이 출토된 바 있다.정개는 ..

< 왕건과 견훤의 혈투 '안동 고창전투' >

왕건과 견훤의 혈투 '안동 고창전투' 일반적으로 '고창전투'라고 알려진 이 전쟁은 왕건을 고려 태조로 만들어준 아주 귀중한 전투였다. 안동이라 지명은 930년 후삼국시대에 생겼다. 고려 태조 왕건이 지어준 안동의 지명은 그 후 1100년 동안 이어왔다. 안동의 옛 이름을 보면 고타야, 영가, 고창, 복주, 길주 등이 있다. 지금도 영가초등학교, 복주초등학교, 길주중학교 등 옛 지명이 쓰인다. 안동 북부는 본래 고구려 영토였다 하지만 전 지역이 신라 영토로 편입됐고 신라 초기에는 고타야군으로, 통일 신라 경덕왕 때 고창군으로 불렸다. 고창군 병산에서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이 사활을 건 대전투를 펼쳤다. 병산은 지금의 안동시 상아동 '득심골'이라고 한다. '득심골'은 안동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인 '월영교' 인..

< 삼별초는 왜 제주도를 최후 거점으로 삼았을까? >

삼별초는 왜 제주도를 최후 거점으로 삼았을까? ‘항파두리’(缸波頭里ㆍ제주 애월읍)는 고려시대 삼별초가 여몽(麗蒙) 연합군에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전멸당한 성(城)이다. 애월 바다가 아스라이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과는 달리, 750년 전 항파두리성의 비장함은 로마군에 항전하다 전원 옥쇄한 이스라엘 마사다(Masada) 요새의 최후 전투와 비교될 만하다.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강화를 떠난 후 3년을 버텨냈지만, 결국 허무하게 막을 내린 무대이기도 하다. 항파두리성 인근 삼별초 유적. * 생각보다 큰 천연 요새 항파두리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3.6㎞로 확인되는데 이는 경기도의 거점 성들보다 훨씬 큰 규모다. 항파두리라는 이름은 몽골 장수 홍다구(洪茶丘, 1244~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