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고려시대 160

< 용인 처인성 전투 >

용인 처인성 전투 때는 1231년 8월, 세계를 사실상 좌지우지했던 몽골제국의 말발굽이 한반도에도 닿기 시작했다. 본디 중국 대륙 북쪽에 위치한 몽골은 본래 각 부족들끼리 분열해 끊임없는 전쟁을 펼치던 혼돈의 땅이었다. 1189년 보르지긴 씨 출신의 테무진이 몽골계 주변 민족을 통합하고 1206년 몽골고원을 통합하고 칭기즈라는 칭호를 받아 칸에 오르면서 세계는 큰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중앙아시아의 부유한 국가인 호레즘 제국도,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지위에 있었던 아바스 왕조도, 중국 대륙의 금나라와 송나라도 몽골제국 앞에선 힘없는 양 한 마리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고려와 다소 동떨어진 곳에 세력을 집중하던 몽골이었으나 급속한 팽창을 거듭하며 북중국, 만주 일대를 지배하에 두면서 필..

<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항파두리 항몽유적은 고려시대 원나라 침략에 맞서 결사 항전한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로 잘 알려진 곳이다.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정복한 원(몽골)나라가 고려를 침략했고,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들어가 저항했으며, 대몽 항전의 중심이 되었던 군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고려와 원나라는 강화를 맺게 된다. 고려가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하자 몽골침략군과 싸우던 삼별초는 굴욕적인 강화에 반기를 든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진도로 들어가 계속 투쟁하게 된다. 1271년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자 새로운 지도자 김통정 장군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갔다. 1273년 4월 28일 여몽 연합군이 군선 160척과 약 1만2천여 병력으로 함덕과 비양도로 쳐들어온다..

< 이자겸의 난 >

이자겸의 난 이자겸의 인주(현재 인천) 이씨 가문은 수십년 간 왕실과 가장 가까운 '외척'(外戚) 세력으로 존재했고, 급기야 이자겸 때에 이르러서는 왕권을 능가하고 위협하는 권세를 부리게 된다. 이른바 '고려판 국정 농단' 사건이었고, 자칫 왕조의 교체마저 불러올 수도 있었던 '대(大)정변'이었다. * 문벌귀족 사회와 인주이씨 권세 11세기 이후가 되면서 고려는 '문벌귀족'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문벌귀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고 왕실의 외척이 된 자들을 말하는 것인데, 고려 성종(成宗, 제6대 왕) 때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했다. 주로 지방 호족이나 개국공신의 후손들이 이에 속했다. 문벌귀족을 지탱한 것은 경제력과 권력 세습이었다. 우선 이들은 권력을 이용..

< 최초 무인 쿠테타 왕건 정변 >

최초 무인 쿠테타 왕건 정변 "궁예 말년에 기병장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한 후 밤중에 함께 태조(왕건)의 집에 찾아와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이에 태조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가지고 와서 태조에게 입히고 여러 장수들이 옹위(擁衛)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드디어 왕공께서 정의의 깃발을 드셨다'라고 소리를 외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뒤질세라 달려오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환호하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 명을 넘었다. 궁예가 그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며 '왕공이 나라를 얻었다면 나의 일은 다 허사로다'라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다가 미복 차림으로 북문(北門)을 빠져..

< '공민왕 피살' 사건 >

'공민왕 피살' 사건 고려의 제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지속된 원(元)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되찾고자 노력했고, '신돈'(辛旽)이라는 인물을 중용해 정치, 사회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기성 세력들의 극심한 반발과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 대내외적인 반란 및 침입 등으로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좌초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고려의 마지막 '개혁혼'(魂)이 사그라졌고, 이후 고려는 돌이킬 수 없는 '망국'(亡國)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고려 시대에 보기 드문 영민(英敏)함과 개혁 의지를 갖췄던 왕. 만약 개혁에 성공했다면 고려의 수명을 발전적으로 연장시키고 스스로도 성군(聖君)으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끝내 뜻을 ..

< 묘청의 난 >

묘청의 난 신채호가 '조선 역사 1천년 이래 제1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던 묘청의 난'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 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곱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中 1127년, 고려는 문벌귀족 등 지배층의 갈등과 왕권 약화, 금(金)나라의 압박 등 대내외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정치 개혁을 모색하고 있던 인종에게 한 승려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바로 '정심'(淨心)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던 서경 승려 '묘청'(妙淸)이다. 묘청을 중심으로 한..

< 무신정변 >

무신정변 * 고려 사회의 문치주의 태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 할 때 그 주변에는 건국에 일조한 수많은 무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공신'(功臣) 세력을 형성해 갓 태어난 고려 왕조의 중심에 위치했다. 심지어 2대 왕 혜종(惠宗)과 3대 왕 정종(定宗) 교체기에 무신들이 대거 동원돼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4대 왕인 광종(光宗) 대에 이르러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무신들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신들을 배제하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거나 요직에 앉혔다. 문신들의 대표적인 정계진출 통로인 '과거제'(科擧制)도 이 때 처음 시행됐다. 이로써 '문치주의'(文治主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 문..

< 아홉 달 만에 사라진 삼별초 >

아홉 달 만에 사라진 삼별초 1270년 8월 19일, 천여 척의 배가 진도 벽파 연동마을에 도착했다.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군이었다. 39년 동안 몽골에 맞서 버티던 고려 왕실이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함께하지 않았다. 흩어지라는 명령이 내려진 뒤였다. * 용장산성 삼별초 탐방로 3코스를 걸었다. 진도의 옛 진입로다. 삼별초군이 진도에 도착하여 용장성으로 넘어가던 길이다. 연동마을에서 출발했다. 삼별초군이 처음 와서 잠깐 머물렀던 마을이다. 서해랑길 6코스가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용장성 가는 길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찔레꽃 향기가 가득했다. 대투개재 네거리에 다다랐다. 오른쪽으로 오르면 망바위가 있고, 왼쪽으로 오르면 거북바위가 있다. 망바위로 발길을 돌렸다. 삼별초군이 망을 보던 바위..

< 제주 해안간의 온평리 환해장성 >

제주 해안간의 온평리 환해장성 환해장성은 제주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돌담이다. '탐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릴 만큼 그 길이가 무려 300여리(약 120km)나 되었단다. 지금은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14곳)만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보고 있는 온평리 환해장성은 온평리 하동 해안가에서 신산리 마을 경계까지 2120m라고 한다. 다른 곳보다 비교적 긴 편인 셈이다. 성벽인 만큼 환해장성을 쌓은 목적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곳 제주 해안가 성벽은 조금 다른 '적'이다. 고려 말기 삼별초(三別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를 잠깐 정리해보면, 고려 고종 19년(서기 1232년)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遷都)했던 조정은 무신정권이 무너진 뒤 몽고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