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97

< 또 다른 겸재 명작들 >

또 다른 겸재 명작들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됐다가 2005년 한국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겸재 정선 화첩의 ‘금강내산전도’. 겸재 화첩 그림은 1925년 독일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조선 땅을 여행하면서 사들여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가져가 소장했던 것이다.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만폭동’. 겸재 내금강 그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울대박물관이 위창 오세창의 컬렉션을 이어받아 소장한 ‘만폭동’ 그림은 겸재가 그린 금강산 내금강 그림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박력이 돋보이는 명품으로 평가된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겸재 정선의 작품 ‘풍악내산총람’.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한 겸재 정선의 명작 ‘청풍계’.

조선시대 2025.05.04

< 동영상-제주 올레 >

동영상-제주 올레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혼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이란 죄로 페위, 처음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이어 1637년 유배소를 제주로 옮기려 사중사, 별장, 내관, 도사, 대전별감, 나인, 서리, 나장 등이 임금을 압송하여 6월16일 어등포로 입항하여 일박하였다.이때 호송 책임자 이원로가 왕에게 제주라는 사실을 알리자 깜짝 놀랐고,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의 글을 아시죠" 하니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광해군 기착비] https://youtu.be/7MjigPZt6GE?si=2aeQedQ6AI2Yi4cx

조선시대 2024.12.27

< ‘무학대사 탑’과 ‘무학대사 탑 앞 석등’ >

‘무학대사 탑’과 ‘무학대사 탑 앞 석등’  경기 양주시 회암사지에 있는 ‘무학대사 탑’(보물)과 ‘무학대사 탑 앞 석등’(보물)의 모습.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중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번창한 왕실 사찰인 회암사 터다. 고려 충숙왕 재위 당시에 인도 출신 승려인 지공이 사찰이 있었던 터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지공의 제자인 나옹선사,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 등의 스님들이 머무르기도 했다.특히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고 할 정도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왕실의 후원 등으로도 유명하다. 이성계는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했고,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회암사지는 1990년대 부터 최근까지 모두 1..

조선시대 2024.10.25

<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두 왕의 시선 >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두 왕의 시선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1762년 윤5월 13일 창덕궁은 말 그대로 살얼음판이었다.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는 아들을 서인으로 만들었고 뒤주에 가뒀다. 마흔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지만 왕은 매몰찼다. 더위가 한창이었을 계절, 세자는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숨졌다.그해 관례를 치르는 사도세자에게 쓴 글에는 '뜻을 원대하게 세우고 사람들을 관대하게 부리고 공평한 마음으로 똑같이 대하고 현명하고 유능한 자에게 일을 맡겨라"고 돼 있다.첫째 아들인 효장세자(1719∼1728)가 요절한 뒤 영조가 어린 세자에게 걸..

조선시대 2024.10.06

< 국왕 친위부대 ‘금군청’ >

국왕 친위부대 ‘금군청’ 금군청은 왕의 친위부대인 금군(禁軍)을 일컫는다. 금군은 조선 중기까지는 그저 금군으로 불리며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등 3위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각 3명의 장수가 통솔하는 구조였다. 그러다 효종 대에 이르러 내삼청으로 통합 일원화하고 하나의 정식 군영으로 발족했고, 이후 현종 7년(1666년)에 금군청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소속 병력도 700명으로 규정했다.금군의 주요 직책은 종2품의 별장을 위시하여 그 아래 정3품의 장수 7명이 포진한 형태였다. 7명의 장수에는 겸사복장 2명, 내금위장 3명, 우림위장 2명이 있었다. 이들 7명의 장수는 7번으로 나누어진 금군의 번장들인 셈이다. 금군은 총 700명으로 내금위가 300명, 겸사복이 200명, 우림위가 200명이다. ..

조선시대 2024.08.09

< 왕실 앞 밤새우며 ‘철통 호위’-선전관청 >

왕실 앞 밤새우며 ‘철통 호위’-선전관청 *  왕의 목숨을 지키는 사람들 조선 시대 무관들이 가장 선호한 직장은 선전관청(宣傳官廳)이었다. 관리들의 직장 선호도는 왕과의 거리에 비례했다.선전관청은 왕과 가장 가까이하는 무관들의 관청이었던 것이다. 선전관청의 임무는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국왕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었다. 선전관청의 선전관들은 심지어 국왕이 잠든 사이에 침실을 호위하는 역할까지 했다. 국왕은 그들에게 목숨을 맡겨두고 잠드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국 초에만 하더라도 선전관청을 정식 기관으로 두지 않았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도 단지 8인의 관원 수를 둘 수 있는 곳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그것도 계약직에 해당하는 ..

조선시대 2024.05.11

< 병자호란 치욕 기억하는 서울 송파구 지명 >

병자호란 치욕 기억하는 서울 송파구 지명 청나라는 1636년 병자년 12월(음력)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에 군신 관계를 강요하고 거부하자 일으킨 전쟁이었다. 병자호란은 이듬해 1월 인조가 항복하고 막을 내렸다. 이후로 두 나라는 왕(청)과 신하(조선)가 됐고, 조선의 군대가 청을 대신해 명과 싸워야 했으며, 청태종의 업적을 기리는 삼전도청태종공덕비를 세워야 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9년간 볼모로 잡혀갔다. 애초 인조는 강화로 피난을 떠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청군이 지금의 은평구까지 쳐들어온 탓에 서쪽으로 가다가는 마주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갔다. 도성에서 떠난 피난길은 남한산성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서울 송파구는 피난길의 경로였다. 송파구 지명을 훑어보면 병자호란의 흔적을..

조선시대 2023.12.16

< 천문도 김정호 '혼천전도’, 北 판본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된다 >

천문도 김정호 '혼천전도’, 北 판본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된다 지리학자 김정호가 그린 조선후기 천문도 ‘혼천전도’(渾天全圖)의 북한 소재 판본이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혼천전도는 지리학자 김정호가 19세기 중엽 ‘여지전도’(輿地全圖)와 함께 한 쌍으로 제작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필사본과 목판으로 모두 전해질 정도로 널리 보급됐다. 국내에는 서울대규장각 등이 소장하고 있으며, 북한 소재 판본은 북한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돼있다고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전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후기 천문도 혼천전도. 북한 소재 판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OANA는 혼천전도가 밤하늘의 별들을 묘사한 지도로, 그 해설과 함께 천문상수 등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도..

조선시대 2023.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