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 왕실 앞 밤새우며 ‘철통 호위’-선전관청 >

엑칼쌤 2024. 5. 11. 06:32

왕실 앞 밤새우며 ‘철통 호위’-선전관청

 

*  왕의 목숨을 지키는 사람들

 

조선 시대 무관들이 가장 선호한 직장은 선전관청(宣傳官廳)이었다. 관리들의 직장 선호도는 왕과의 거리에 비례했다.

선전관청은 왕과 가장 가까이하는 무관들의 관청이었던 것이다.

 

선전관청의 임무는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국왕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었다. 선전관청의 선전관들은 심지어 국왕이 잠든 사이에 침실을 호위하는 역할까지 했다. 국왕은 그들에게 목숨을 맡겨두고 잠드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국 초에만 하더라도 선전관청을 정식 기관으로 두지 않았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도 단지 8인의 관원 수를 둘 수 있는 곳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그것도 계약직에 해당하는 체아직이었다. 그리고 경국대전 이전에는 아예 선전관에 대한 법적인 규정 자체가 없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자면 조선 초에는 임금의 목숨을 지키고 명령을 전달하는 선전관들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는 뜻이다. 임금이 가장 신임하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을 관직과 관계없이 임금이 자의적으로 선택해 주변에 배치했던 것이다. 또한 그 자격이나 숫자도 명시적으로 정해놓지 않고 신분에 상관없이 임금이 믿고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지명할 수 있었다. 심지어 환관도 선전관을 지명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선전관은 임금이 가장 총애하고 신뢰하는 무관이었을 수밖에 없었고, 무관이면 누구나 선전관이 되길 원했을 것이다. 이는 곧 선전관이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선전관청이라는 기관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선전관청이 정식 관청이 되면서 선전관은 계약직인 체아직에서 벗어나 정직이 되었다. 선전관청은 ‘속대전’엔 정3품 아문으로 명시되었고, ‘대전통편’엔 선전관청의 임무가 명확하게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대전통편’에는 선전관청의 임무를 형명(形名: 깃발이나 북 등으로 군대의 행동을 호령하는 신호법), 계라(啓螺 : 왕의 거동 때 북이나 나팔을 치거나 불던 일), 시위(侍衛)·전명(傳命, 명령 전달) 및 부신(符信,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신패)의 출납을 장악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선전관은 규정에 따른 이러한 임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고 목숨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한 소임으로 여겼다. 그들은 임금 앞에서 유일하게 칼을 소지하고 근무할 수 있었기에 임금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존재였다.

 

선전관청의 구성원은 때에 따라 변화가 많았지만, 법상으론 ‘속대전’엔 21인, ‘대전통편’엔 24인, ‘대전회통’엔 25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소수 정예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 정예 무관들은 왕과 나라의 안위를 맡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따라서 무관이라면 누구나 선전관이 되고 싶은 것은 당연했고, 경쟁도 치열했다.

 

선전관의 숫자는 겸선전관(兼宣傳官)을 합쳐 대략 70인에서 80인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속대전’에 의하면 선전관청의 선전관은 21인이었는데, 수장은 정3품 당상관인 행수 1인, 그 예하에 종6품 참상관 3인, 종9품 참하관 17인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종6품의 문신이 겸하는 선전관 5인과 종6품의 무신이 겸하는 선전관 38인, 종9품의 무신이 겸하는 선전관 12인 등 겸선전관 55인이 별도로 있었다.

 

선전관청에 관한 세심한 내용들은 선전관청의 일기인 ‘선청일기’에 남아 있는데, 현재까지 존속하는 ‘선청일기’는 정조에서 고종 대에 걸쳐 작성된 106책이 있다. ‘선청일기’가 고종 대까지만 작성된 것은 선전관청이 1882년(고종 19년)에 혁파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