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403

<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 대원군 석란도 >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 대원군 석란도 전 명성황후 초상(傳 明成皇后肖像), 조선 말기, 비단에 채색, 66.5x48.5cm, 179x70cm. “음력 1895년 9월 27일 러시아의 위베르(韋貝) 공사의 문서에는 같은 해 음력 8월 22일 고종이 ‘민왕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칙서(勅書)’를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정황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일제에 의해 폐출(廢黜·직위나 관직을 떼고 내침)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명성황후의 모습이 기록된 적 없음을 이용해 일제가 명성황후의 초상화를 평민의 모습으로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석파 이하응 석란도, 1820~1898, 명주에 수묵 명성황후의 시아버지이자 정적이었던 흥선대원군의 유물은 인간사의 복잡함을 드러내면서도 그 자체로 예술적 향취를 전한다..

조선시대 2025.08.15

< 임오화변(壬午禍變)-세자 살해의 몸통과 공범들 >

임오화변(壬午禍變)-세자 살해의 몸통과 공범들 소론의 완전한 전멸을 주장하며 대리하는 세자에게 아버지 영조의 소론 중용 탕평책이 잘못된 정책이라고 고해야 한다고 세자를 강하게 압박하는 세력은 노론 남당이었다. 세자는 노론 남당들의 압박에 넘어가지 않았고, 그 결과 세자와 노론 남당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소론이 전멸하자 이제 조정은 세자에게 적대적인 노론 남당 과 세자에게 우호적인 다른 노론들(노론 동당, 중당, 북당)로 크게 편이 갈라졌다. 여기에 영조가 66세에 재혼하면서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세력들이 조정에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세자에게 적대적인 세력은 노론 남당을 중심으로 계비 정순왕후 김씨 세력이 더해졌다. * 나경언(羅景彦)의 고변: 세자 제거의 몸통 을해옥사로 ..

조선시대 2025.07.20

< 왕족을 유배 최적지, 강화 교동도 >

왕족을 유배 최적지, 강화 교동도 강화도에 닿는 바닷물은 온통 흙탕이다. 빠른 물살이 바닥 펄을 끊임없이 파헤쳐 만든 색깔이다. 저 물살을 해자 삼아 위급에 처한 나라가 궁성을 쌓고 강화를 맘껏 후리고 짓이겼었다.교동도는 강화도 바깥 여러 섬 중 하나다. 이 섬은 강화를 거쳐서만 갈 수 있다. 늘 강화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존재로, 이 섬에도 다리가 걸렸다. 바다는 그럼에도 강화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제법 깊어 보이는 물색이 차별 없이 퍼렇다.물이 풍부해서인지 흐르는 굵기도 만만치 않다. 그 너머로 검은 산하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바다보다 높게 늘어져 누운 황해도 연백이다. 저 산하는 누군가에겐 뼈에 사무치는 흙이다. 한평생을 그리워하면서도 발길 한번 내딛지 못한 땅이기 때문이다.예성강이 지척이다...

조선시대 2025.07.06

<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 앞에 검시는 거부되었다 >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 앞에 검시는 거부되었다 1645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9년 만에 조선의 궁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인조의 반응은 냉담하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조는 청나라에 물든 소현세자의 현실 외교 노선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했던 것이다. 세자의 개혁적 성향은 보수적 인조에게 위협이었다.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온 후 두 달 정도 지났을까? 음력 4월 21일 밤, 소현세자에게 갑자기 오한(惡寒)이 났다. 오한은 밤사이 잠시 진정되는가 싶더니 다음 날 정오경 다시 오한이 나타나 어의 박군과 이형익이 입진하여 진찰했다.어의 박군이 증상을 살피고 진맥을 하더니 “학질(虐疾)이옵니다. 우선 내일 아침에 침을 놓아 학열(瘧熱)을 내린 뒤, 다시 ..

조선시대 2025.07.05

< 영조의 소론 중용 탕평과 친소론으로 키워진 세자 >

영조의 소론 중용 탕평과 친소론으로 키워진 세자 ◆ 보여주기식 소론 중용 탕평정책, 친소론으로 키워진 세자 영조 4년(1728) 그해에 맏아들 효장을 잃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효장세자 사망 이후 영조는 40세가 넘을 때 까지 아들을 얻지 못했다. 영조 5년에는 종친 중에서 입양하여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라왔을 정도였다.영조가 후사를 얻지 못하는 동안에 노론 측에서는 줄곧 양자 입양이나 또는 의약을 포함한 각종 비법을 수시로 권하며 영조의 왕권을 압박했다. 이렇게 초조한 세월을 보내던 와중 영조 11년(1735)에 영빈 이씨가 아들을 출산했다. 영조 나이 42세였다. 후일 27세의 나이에 미치광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쓴 채로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해야 했던 ..

조선시대 2025.05.26

< 또 다른 겸재 명작들 >

또 다른 겸재 명작들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됐다가 2005년 한국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겸재 정선 화첩의 ‘금강내산전도’. 겸재 화첩 그림은 1925년 독일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조선 땅을 여행하면서 사들여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가져가 소장했던 것이다.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만폭동’. 겸재 내금강 그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울대박물관이 위창 오세창의 컬렉션을 이어받아 소장한 ‘만폭동’ 그림은 겸재가 그린 금강산 내금강 그림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박력이 돋보이는 명품으로 평가된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겸재 정선의 작품 ‘풍악내산총람’.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한 겸재 정선의 명작 ‘청풍계’.

조선시대 2025.05.04

< 동영상-제주 올레 >

동영상-제주 올레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혼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이란 죄로 페위, 처음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이어 1637년 유배소를 제주로 옮기려 사중사, 별장, 내관, 도사, 대전별감, 나인, 서리, 나장 등이 임금을 압송하여 6월16일 어등포로 입항하여 일박하였다.이때 호송 책임자 이원로가 왕에게 제주라는 사실을 알리자 깜짝 놀랐고,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의 글을 아시죠" 하니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광해군 기착비] https://youtu.be/7MjigPZt6GE?si=2aeQedQ6AI2Yi4cx

조선시대 2024.12.27

< ‘무학대사 탑’과 ‘무학대사 탑 앞 석등’ >

‘무학대사 탑’과 ‘무학대사 탑 앞 석등’  경기 양주시 회암사지에 있는 ‘무학대사 탑’(보물)과 ‘무학대사 탑 앞 석등’(보물)의 모습.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중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번창한 왕실 사찰인 회암사 터다. 고려 충숙왕 재위 당시에 인도 출신 승려인 지공이 사찰이 있었던 터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지공의 제자인 나옹선사,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 등의 스님들이 머무르기도 했다.특히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고 할 정도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왕실의 후원 등으로도 유명하다. 이성계는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했고,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회암사지는 1990년대 부터 최근까지 모두 1..

조선시대 2024.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