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97

< 정조 독살설 >

정조 독살설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지금까지도 역사학계 등에서 큰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바로 '정조 독살(毒殺)설'이다. 당시 행해졌던 의료 처방 및 정국 구도에 기반해 독살 가능성은 광범위하게 유포됐다. 일각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의 가능성을 낮게 보며 몇 가지 근거를 기반으로 반박하고 있다. * 사도세자의 아들, 왕위에 오르다 정조는 잘 알려진 대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英祖, 제 21대 왕)의 장자였지만, 영조와의 계속된 갈등 끝에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비운의 세자였다.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나 품성 측면에서 매우 보수적이었던 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갈..

조선시대 2021.07.31

< 하나의 반란 '중종반정' >

하나의 반란 '중종반정' 1506년(연산 12년), 연산군(燕山君, 제10대 왕)의 광기어린 폭정(暴政)에 대신들 및 백성들의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무수한 피의 숙청을 불러온 두 번의 사화(士禍)와 사치 및 향락으로 세종, 성종 때 일군 조선의 정치·사회적 발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마침내 이를 보다 못한 훈구파(勳舊派)들을 중심으로 정변이 일어났다. 역사는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른다.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정'(反正)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이 '반정'은 그릇된 상태에 있던 것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산군이라는 잘못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중종·中宗)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조선시대 2021.07.24

< 병자호란 비극의 단초 '인조반정' >

병자호란 비극의 단초 '인조반정' 전하께서는 명길의 문서를 두 손에 받쳐들고 칸 앞에 엎드리시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라고 하면 술을 따라 올리시겠습니까." 최명길(주화파) "전하,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는 것과 같이.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김상헌 "명길이 말하는 삶은 곧 죽음이옵니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전하. 상헌이 말하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김상헌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최명길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전하,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

조선시대 2021.07.17

< 계유정난, 조선의 질서를 흔들다 >

계유정난, 조선의 질서를 흔들다 계유정난은 조선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후 조선 역사의 향방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적장손 왕위 계승 등 조선의 헌정질서가 흔들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세종,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면서 자리를 잡아가던 유교적 헌정질서를 왕실 종친이 앞장서 무너뜨린 사건은 당대의 유학자는 물론 후대의 역사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더욱이 계유정난을 계기로 '공신세력'이 대두하면서 왕권이 약화됐고, 조선 건국의 명분을 제공했던 고려 권문세족들의 부패한 특권 문화가 조선 공신세력들에게로 고스란히 전수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후 조선에서는 사화, 환국 등 유혈 정권교체가 있을 때마다 승리자의 자축 세리머니라고 할 수 있는 '공신 인플레이션'이 일반화 됐다. 태종 이..

조선시대 2021.05.08

< 정조가 김홍도에게 그리게 한 '호렵도' >

정조가 김홍도에게 그리게 한 '호렵도'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 정조(1752~1800)의 다양한 업적 가운데 새로운 그림 주제로 ‘책가도(冊架圖)’와 ‘호렵도(胡獵圖)’를 그리게 한 것은 예술에 끼친 영향이 엄청났다. 책장에 놓인 서책을 중심으로 골동품과 문방구 등을 그린 ‘책가도’는 국왕을 상징하는 어좌 뒤 ‘일월오봉도’ 대신 놓이기도 했다. ‘호렵도’는 이름 그대로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책가도가 ‘문치(文治)’를 뜻한다면 호렵도는 ‘무비(武備·군사관련 준비)’를 강조한 정조의 정치철학을 대변한다. 두 그림 모두 단원 김홍도를 통해 처음 그리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홍도가 그린 책가도와 호렵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함께 지난해..

조선시대 2021.02.18

< 수만 병력 12km 앞 고개서 사라졌다 >

수만 병력 12km 앞 고개서 사라졌다 인조는 다시 혹독한 겨울을 보낸다. 또 한성을 비운다. 세 번째다. 1636년 12월(이하 음력),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1627년 1월 정묘호란 때 강화로 두 번째 파천을 한다. 그리고 병자호란. 청군은 공성전을 피하며 한성으로 들이닥친다. 이 교수는 "청군이 상인으로 위장하는 기만술로 압록강을 건너 길을 뚫은 뒤, 조선군이 지키는 성과 대치할 최소의 병력만 남기고 한성으로 속도를 냈다"고 설명했다. 13년 전 도주하던 이괄군 일부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에 들어가 조선의 국방 정보를 불었다는 건 이미 밝힌 바 있다. 강화로 가는 길이 청군에 막히자, 인조는 이괄의 도주로와 같은 광희문을 통해 도성을 벗어난다. 광희문은 도성 내 시신을 내보낸 문이다. 시구문이라고도..

조선시대 2021.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