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고려시대

<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

엑칼쌤 2021. 8. 15. 21:50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항파두리 항몽유적은 고려시대 원나라 침략에 맞서 결사 항전한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로 잘 알려진 곳이다.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정복한 원(몽골)나라가 고려를 침략했고,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 들어가 저항했으며, 대몽 항전의 중심이 되었던 군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고려와 원나라는 강화를 맺게 된다. 고려가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하자 몽골침략군과 싸우던 삼별초는 굴욕적인 강화에 반기를 든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진도로 들어가 계속 투쟁하게 된다. 1271년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자 새로운 지도자 김통정 장군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갔다.

 

1273년 4월 28일 여몽 연합군이 군선 160척과 약 1만2천여 병력으로 함덕과 비양도로 쳐들어온다. 삼별초 군은 함덕과 파군봉, 항파두성에서 적에 맞서 치열한 방어전을 폈으나 병력이 월등한 연합군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결국 70여 장수가 항파두리성을 탈출해 붉은오름에 올라간다. 그리고 이곳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여 모두 장렬히 전사한다. 홀로 남은 김통정 장군이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결함으로써 삼별초 영웅담은 막을 내린다.

 

* 천연의 요새


유적지를 둘러싼 토성(土城). 자갈을 약간 함유한 흙을 쌓고 다지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한 강도로 쌓은 이 토성은 작은 내성과,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언덕과 하천을 따라 축성한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은 그 길이가 15리(6㎞)에 이른다고 전해졌으나 측량조사 결과 3.8㎞로 파악됐다. 이 외성으로 둘러싸인 면적은 약 23만여 평으로 꽤 넓다. 지휘부의 거처였을 것으로 보이는 내성은 둘레 750m의 정사각형으로 현재 발굴조사작업 중이다. 동서 양편에 하천도 흐르고 있어 천연의 요새에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토성길을 걸으며 삼별초가 아닌 제주 민초들의 편에서 당시를 상상해본다. 이 토성을 삼별초 군사들만의 힘으로 쌓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제주 백성들의 피와 땀이 뿌려졌을 것이다. 그들은 삼별초의 대의에 공감해서 자발적으로 나섰을까, 아니면 뭍에서 온 새로운 권력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을까.

 

김통정 장군은 왜 이곳 애월읍 고성리 일대를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을까. 전시관에서 보여주는 자료를 보니, 여몽 연합군이 쳐들어올 루트로 예상한 함덕포와 명월포의 지세를 고려하여 그 중간지역인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삼별초가 버틴 기간은 2년 반이었다.

 

삼별초가 패배한 후 제주의 민중들은 무려 100여 년을 몽골에 시달려야 했다.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직접 제주를 지배한 몽골 세력이 제주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1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1374년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이 제주도에서 목호(牧胡:몽골의 목자)의 난을 토벌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주인들은 몽골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100년의 고통

 

이 100년 동안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지로, 일본과 남송 공략을 위한 전략기지로 이용됐다. 한 세기에 걸친 몽골의 지배를 겪으면서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까. 그때의 영향일지 모르겠으나 제주어에는 우리말 어감과는 다른, 매우 낯선 느낌을 주는 어휘들이 간혹 보인다. 특히 말과 관련된 용어에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제주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은 고소리술과 빙떡, 상애떡 등도 몽골 지배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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