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직접' 통치했다
* 소련점령군의 북한 통치는 간접통치였나 직접통치였나.
소련은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훗날에도 자신이 북한을 점령하던 시기에 모든 것을 조선인에게 맡겨 조선인에 의한 통치가 실시됐다고 자랑했다. 특히 미국의 남한점령정책과 비교해, "미국은 남한을 직접통치했지만 우리는 북한에 자율권을 주었다"고 부연하기도 했다. 이 주제에 관해, 결코 친소적이지도 친북적이지도 않은 객관적 연구자들도 "미국은 남한에서 직접통치를 했으나 소련은 북한에서 간접통치를 했다"는 결론을 제시하곤 했다.
미국의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들은 "소련의 북한점령정책은 소련의 동유럽점령정책과 많이 달랐다. 소련이 동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강압 통치를 한 데 비해 북한에서는 북한인의 이익과 판단을 존중했다"고 논평하면서, 소련의 북한점령통치를 소련의 동유럽점령통치와 동일시하는 방법은 오류라고까지 주장했다.
과연 그러했던가. 우선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제1극동방면군 산하 제25군이 취한 일련의 조치를 살피기로 한다.
*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의 이름으로 평양에서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제하의 문건을 발표했다. 이 문건이 언제 발표됐는지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주장이 여럿 있다. 그러나 소련이 평양에 주둔하기 시작한 날인 1945년 8월 24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건은 우선 "붉은 군대의 위력은 크고도 큽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했다. 북한인들에게 자신의 막강한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앞으로 소련점령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협박'을 함축한 것이다. 그다음에, "붉은 군대는 이 위력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정복함에 이용하지 않았으며 또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다짐하고, "붉은 군대는 조선에 소비에트 질서를 설정하거나 또는 조선을 얻으려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부연했다.
더욱 구체적으로, "민주주의 원칙과 시민의 자유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일적이고 민주적인 정당의 창당과 그것을 위한 모든 활동을 허락할 것입니다"라고 약속했다. 이 문건은 소련군의 해방자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곳곳에서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 북한 주민으로부터의 재물 탈취 등이 빈번히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행각은 1945년 12월 초순에 이르러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본국 정부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중단된다.
그렇지만 그런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소련군이 입북하기에 앞서, 제2회에서 지적했듯, 조선인들은 북한의 모든 곳에서 이미 자치기구들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소련군은 입북하자마자 그 기구들을 자신의 입에 맞게 개편했으며, 여기에 저항하거나 어긋나는 사람들을 제거했다. 약 30만 명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의 목숨을 건 탈북·월남은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했다.
* 군경무사령부의 통치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문건 발표와 동시에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는 1945년 8월 26일에 평양에 '봐나야 코멘다투라', 곧 군경무사령부(軍警務司令部) 총사령부를 개설했다. 그러곤 주요한 시(市)와 군(郡) 등의 행정단위에 그 지역을 관할하는 군경무사령부를 세워, 그 수가 1945년 9월 28일께 시점에서 모두 54개에 이르렀다. 면·리·동의 단위에는 군경무사령부가 설치되지 않았으나, 군에 설치된 군경무사령부의 관할은 그 아래 단위들에까지 미쳤다.
군경무사령부는 차차 더 확대됐다. 1948년 중반에는 그 범위가 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황해도·강원도 등 도합 6개의 도(道)와 7개의 시 및 85개의 군에 미쳤으며, 이 모든 지역에 배치된 군경무사령부 소속 군인의 수는 1262명에 이르렀다.
군경무사령관은 (ⅰ)소련군 보급에 긴요한 시설과 상업기관 및 생산기업소의 조업 재개를 명하고 노동자와 사무원의 직장 이탈을 금할 수 있었으며, (ⅱ)주류 판매와 밀수 행위의 금지, 마약업소와 사창가의 폐쇄, 생필품 가격 통제의 권한도 보유했고, (ⅲ)도로와 교량의 수리, 파괴된 건물의 해체, 도시의 청소, 정미소와 발전소 및 상수도의 복구와 군사시설의 해체를 위한 의무노동에 주민을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열리는 모든 집회와 회의에 소련군 대표를 파견해 참관하거나 감시하게 하는 권한을 가졌으며, 모든 연주회와 연극 공연을 사전에 검열하는 권한을 가졌고, 모든 신문과 잡지 및 기타 출판물을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 주민에 대한 철저한 감시
군경무사령관의 권한은 그것들 밖에도 더 많았다. 군대 내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주민에 대해서도 휘하의 요원들을 통해 감시할 수 있었다. 그의 지휘를 받는 그들은 "우리 요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스탈린의 구호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정치공작에 숙달된 정치장교들로서, 대중 동원과 선동 그리고 반대 세력 제거를 위한 폭력 행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의 제2인자로 북한 전역의 군경무사령부를 지휘했던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제프 소장은 훗날 "군경무사령부는 반인민적 세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고 공개 발언했다. 여기서 '반인민적 세력'은 소련군의 점령통치 또는 공산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의미했다.
소련의 북한점령통치는 군정이었나 아니었나.소련의 북한점령통치가 직접통치였나 간접통치였나에 관한 논쟁은 그것이 군정이었나 아니었나의 논쟁과 표리관계를 형성했다. 직접통치였다는 주장은 그것이 군정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간접통치였다는 주장은 그것이 민정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핀 군경무사령부의 역할은 소련군이 사실상 군정을 실시했음을 보여주었다. 북한 전역에 설치된 군경무사령부가 주민을 감시하면서 북한을 지배한 것이다. 그 점을 우리는 다음의 논점 4에서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 민정담당부사령관직의 신설
소련 정부는 일본이 태평양지역연합국최고사령부(SCAP)의 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상대로 항복 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 다음 날에 북한은 물론이고 만주와 몽골 등 동북아시아의 주요 지역들을 점령한 소련 극동군 제1방면군을 연해주군관구로 개편했다. 이때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9월 초순과 중순 사이에 연해주군관구는 북조선주둔소련점령군사령부에 군경무사령부와 별도로 민정담당부사령관직을 신설했다. 군경무사령부를 통해 북한을 철저히 통제하면서도 소련은 자신이 군정이 아니라 민정을 실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러한 이름을 붙인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던 것이다. 민정담당부사령관은 우리가 다음에서 보듯 군경무사령관과 함께 북한 전반에 관한 점령통치를 강화하는 데 힘을 보탰다.
민정담당부사령관으로는 연해주군관구에 소속된 제35군 군사위원 로마넨코 소장이 임명됐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1945년 8월 초순과 중순 사이 평양으로 부임했으며, 행정정치부·사법검찰부·보안검열지도부·상업조달부·산업부·농림부·통신부·교통부·재정부·보건위생부·교육문화부 등 11개 부를 개설하고 1945년 10월 3일 공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무엇보다도 사법검찰부 및 보안검열지도부는 그 명칭이 말하듯 북한 주민을 통제하거나 강압하는 부서였다.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포미치 스티코프 상장의 지시를 받으면서, 그는 북한의 모든 기관과 주민들을 통제했다. 북한 사람들 사이에 펴진 소문으로는, 그는 여러 곳에 비밀 처형장을 설치하고 소련의 통치 방향이나 방식에 저항하는 북한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비밀 처형장이 평양에만 17곳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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