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정부

< 쌍용자동차 사태 >

엑칼쌤 2015. 10. 17. 20:08

쌍용자동차 사태

 

 

쌍용차사태는 2009년 4월 8일 사측이 전체 근로자의 36%인 2646명 인력감축 계획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쌍용자동차는 원래 대구 출신 김성곤이 세운 회사다. 김성곤은 박정희 대통령의 형 박상희와 가까워 1960년대 공화당 재정부장을 지내면서 쌍용을 국내 10대 재벌로 키웠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으며 경영권이 중국 상하이차로 넘어갔다. 상하이차는 쌍용차 인수 후 4년간 한 푼의 추가 투자 없이 기술만 중국 본사로 빼돌리다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그리고 경영상의 이유로 대량 정리해고를 단행한 것이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상하이차는 회계장부를 조작해 경영위기를 과대 포장했다.

 

이미 대량해고 방침에 대항해 노동자들은 2009년 5월 22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은 공장을 폐쇄하고 공권력과 용역을 동원했다. 물과 음식이 끊긴 상태에서 노동자들의 처절한 공장 점거농성이 지속됐다. 물과 음식마저 봉쇄한 정부의 조치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사회단체는 인권침해라며 반발했다. 7월 31일에는 국제엠네스티가 농성 노동자에게 물과 식량을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과 용역의 무력진압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은 쇠파이프와 새총, 화염병으로 무장했다. 드디어 8월 4일 새벽, 경고방송과 함께 경찰 헬기에서 최루액이 발사되는 것으로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무자비한 경찰의 진압작전은 TV화면으로 거의 생중계됐다.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크레인으로 공장 옥상에 올리는, 바로 그해 초 용산참사에서 사용된 진압방식이었다.

 

* 무자비한 경찰의 진압작전 생중계

 

일부 공장 옥상을 장악한 경찰은 8월 5일 본격적인 2차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토끼몰이식 체포와 함께 도망가는 노조원의 목을 방패로 찍고, 손사래를 치는 노조원들에게 곤봉세례가 이어졌다. 노조원들은 볼트 새총과 화염병으로 대항했지만 테이저건으로 무장한 경찰특공대를 막을 순 없었다. 당시 조연오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정당하게 법 집행을 하는 경찰을 폭행하는 사람을 가만히 두느냐”고 강변했다.

 

쫓긴 노조원들은 인화물질이 많은 도장공장으로 몰렸다. 급기야 대형참사를 우려한 국가인권위원회가 진압 자제를 요청했다. 결국 공장 점거농성 77일 만에 노조는 해직자의 52%에 희망퇴직, 48%에는 무급휴직이라는 사측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집행부 22명도 구속됐다. 사측은 ‘공장이 2교대 생산물량을 확보하는 즉시 무급휴직자, 영업점 전직자, 희망퇴직자 순으로 복직을 실시한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쌍차사태는 일단락되는가 했다.

 

 

 

사측의 파산 신청 예정일인 5일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경찰이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해 옥상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노조원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쌍용차는 2011년 다시 인도 마힌드라 그룹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나름 정상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해직자들은 약속대로 복직을 요구했다. 김득중 지부장 단식에 이어 김정우 지부장 단식까지 더해졌다. 그러니까 김득중 지부장은 이번이 두 번째 단식투쟁이다.

 

이후 해직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했다. 평택공장 앞 희망텐트(2011년 12월), 서울 대한문 앞 천막농성(2012년 4월 5일~2013년 4월 5일), 평택 30m 송전탑 고공농성(2012년 11월 21일~2013년 5월 9일), 평택공장 70m 굴뚝농성(2014년 12월 13일~2015년 3월 23일), 인도 본사 원정 시위(2015년 10월) 등 갖가지 장기·고공·해외 농성이 이어졌다.

 

지지 및 성원도 이어졌다. ‘쌍용자동차 희생자 추모와 해고자 복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5대 종단 33인의 종교인들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라’며 쌍차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특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2009년 7월 24일 평택공장 앞에서 ‘쌍용차의 평화적 해결을 염원하는 평화미사’를 시작한 이래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희생자 추모미사까지 무려 225일간 미사를 진행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미사는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을 거쳐 236차 굴뚝농성장 앞 미사로 이어지고 있다.

 

법적 투쟁도 계속했다. 노동자의 해고무효 소송과 사측의 손해배상 소송이 맞붙고 있다. 해고무효 확인 소송은 1심에서 원고 패소했으나 고법에서 ‘회사의 회계조작을 통한 경영위기 과장’을 이유로 해고 노동자가 승소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13일 대법원은 다시 회사측 손을 들어줬다. 심지어 김득중 지부장이 ‘진보단일 노동자 후보’라는 명함을 들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정치투쟁까지 시도했다.

 

결국 쌍차사태는 노동사태에 관한 정신적·신체적·법적·정치적·종교적 등 노동운동의 모든 것이 망라된 노동투쟁의 종합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가운데 해고자 28명이 자살하거나 지병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아 있는 해고자들도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