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만주의 독립영웅, 최재형, 이상설의 처형장·시신 없는 碑
독립운동 현장으로서 연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863년 한인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포시에트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지신허(地新墟)라는 마을을 만들어 처음 정착한 뒤 연해주로 한인 이주가 급증했다. 1910년 일제강점 전후로 애국지사들이 대거 망명하며 독립운동의 해외 전초기지로 자리를 잡았다.
◇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우수리스크의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38번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인물인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在亨·1860∼1920)이 말년에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러시아인 소유로 넘어갔다가 얼마 전 재외동포재단 지원으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구입해 기념관으로 준비 중이다. 현재 리모델링 공사 막바지 단계로 아직 유품과 사료는 전시되지 않는다. 단층의 건물에는 “이 집은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이며 전로(全露)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했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헌병대에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곳이다”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최재형은 함경도 노비 집안에서 태어나 9세에 부친을 따라 지신허로 이주한 뒤 연해주 한인의 지도자요, 독립운동의 대부로 성장했으며, 안중근 의거의 후원자였다. 이 지역의 연로한 한인 후손들은 “최재형을 빼고 러시아 한인의 역사를 말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러시아군대를 상대로 한 청부업으로 부를 축적한 최재형은 1905년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전 재산과 목숨까지 조국에 바쳤다. 독립운동과 광복군의 후원조직이 된 동의회와 권업회 창립, 대동공보 발간을 비롯해 연해주 한인들의 교육과 생업, 망명자들의 숙식제공 등에 혼신을 다했다.
안중근이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까지 마지막 2년은 그의 32년 생애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떠나기까지 최재형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후원과 보호를 받았다. 최재형의 여섯째 딸인 최 올가 페트로브나의 회고에 따르면, ‘안중근이 부친의 집에서 거주하면서 사격연습을 하는 등 ‘테러사건’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른바 ‘4월사변’이 시작된 1920년 4월 4일 밤 연해주 일대 고려인 밀집 지역을 습격한 일본군에 의해 볼로다르스카야 집에서 체포된 최재형은 멀지 않은 왕바실재 언덕에서 이튿날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날 찬 빗줄기를 뚫고 비포장길을 한동안 올라가자 왕바실재 언덕이 나타났다. 기념비나 안내판도 없이 잡초만 무성해 최재형에 대한 한민족 후손의 예우 수준을 보는 듯하며 낯이 뜨거웠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인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함께 갔던 한인 후손 최 나젤르다(83) 씨가 한국어로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기독교인이었던 최재형을 추모했다. 최재형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지만, 여전히 국민 사이에 친숙하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 수이푼강에 뿌려진 고혼(孤魂)…이상설
우수리스크 수이푼강은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동해로 흘러든다. 독립운동가 이상설(李相卨·1870∼1917)은 임종 전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워 수이푼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음 뒤에라도 동해를 거쳐 고국에 가 닿고 싶다는 뜻이리라. ‘슬픈 강’이란 별칭을 가진 그 강변에는 폭 1m, 높이 2.5m의, 시신이 없는 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세운 것이다. 강물 건너편 초원 너머로 옛 발해 산성이 보인다.
이상설은 주로 헤이그 특사(1907)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해외독립운동의 선구자였다. 이상설은 1906년 간도 용정에 최초의 민족학교 서전서숙을 세웠고, 헤이그 특사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와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로 알려진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으며, 1910년에는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의병을 규합해 13도 의군을 편성했다. 1914년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앞선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에 선임됐다. 1917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생을 마치니 47세였다. 연해주 한족의 후손들은 이상설을 최재형·안중근·이동휘와 함께 이 지역 독립운동가로 손에 꼽는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에는 최재형 다음으로 주요하게 이상설을 배치해 놓았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두 사람은 하얼빈 거사 전 2년여간 이곳 연해주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머리를 맞대었을 테고, 안중근의 마음속에 이상설에 대한 깊은 존경이 생겨났을 것이다. 연해주는 이들 선구자의 뜨거운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항일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의열단-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을 취하여" > (0) | 2018.11.03 |
|---|---|
| <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 > (0) | 2018.11.01 |
| < 국군의 뿌리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 (0) | 2018.09.17 |
| < 日, '항일 기사' 베델 고소. 英 두 번째 재판 후 中 감옥 수감 > (0) | 2018.09.07 |
| < 영국 언론인 베델, 日 황무지 개간권·을사늑약 부당성 폭로 > (0) | 2018.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