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
조선의 독립군은 1920년 6월 7일 중국 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대규모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국내외 동포들과 세계만방에 조선 독립의 희망을 알린 신호탄이자 항일무장투쟁의 서막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다.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당시 세계적인 수준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
▲ ‘봉오동 전투 당시 독립군 단체 현황 |
국제 정세도 무장독립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승전국들은 패전국과의 조약 협상, 그리고 전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협의하기 위해 1919년~1920년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패전국들의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으로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다.
민족자결주의의 발표는 당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전 세계의 약소민족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발칸반도 및 동유럽의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하는 원칙일 뿐이었다.
기존의 병력으론 독립군을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 지휘부는 야스카와 추격대대(월강 추격대)를 편성하여 '간도 독립군 섬멸 명령'을 내린다. 독립군의 움직임에 불안함을 느낀 일본군은 단단히 준비한 군대를 보내고 국경을 넘는 무리수까지 두었다.
둘, '보급의 힘'이다. 1916년 당시 북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숫자는 18만 명에 달했다.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한 이들은 조선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이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학교를 세워 교육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시켰다. 무기, 식량, 의복 등 보급도 도왔다.
특히 봉오동 전투에서 사용한 독립군의 무기는 주목할 만하다. 이전까지 독립군들은 조총 수준에 불과하던 화승총을 쓰거나, 다양한 수입 무기를 구해 사용했다. 당연히 성능이나 탄약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넷, '무명 독립군들의 힘'이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연합, 보급, 작전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군의 희생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나 무장독립투쟁에 몸을 던진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들이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전보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제대로 훈련된 군대이고 작전, 정보력도 한 수 위라고 평가할 정도로 두려움을 가졌다.
'항일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안중근 의거' 도운 최재형 > (0) | 2019.08.15 |
|---|---|
| < '자유시 참변'의 진실 > (0) | 2019.08.14 |
| < 동영상-"안중근의사, 기독교 묘지에 묻혔다" > (0) | 2019.05.29 |
| < 日 항복 소식에 김구는 탄식하고... > (0) | 2019.05.29 |
| < 동족에 비난받은 이승만, 총탄 맞은 김구 > (0) | 2019.05.0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