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 전설의 갑옷 명광개(明光鎧)와 황칠(黃漆> )

엑칼쌤 2009. 2. 22. 17:35

< 전설의 갑옷 명광개(明光鎧)와 황칠(黃漆) >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 제5 무왕(武王) 27년(626) 조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明光鎧)를 바치면서 고구려가 길을 막고 상국(上國.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막는다고 호소했다. 이에 (당) 고조(이연. 李淵)는 산기상시(散騎常侍)인 주자사(朱子奢)를 백제로 보내어서는 조서를 내려 우리(백제)와 고구려가 맺힌 원한을 풀라고 달랬다."(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 來詔諭我及高句麗平其怨)

명광개(明光鎧)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백제는 당나라에 뇌물로까지 바치면서 당나라가 고구려에 압력을 가해달라고 부탁했을까?

명광개는 글자 그대로는 빛을 발하는 갑옷이라는 뜻이다. 개(鎧)라는 쇠로 만든 갑옷이다. 이 글자는 선진(先秦)시대 문헌인 관자(管子)의 지수편(地數篇)에 "칼과 갑옷을 만들었다"(爲劍鎧)라는 표현에서 벌써 보인다.

나아가 이 글자를 합성어로 활용한 ▲개갑(鎧甲. 삼국지 오서 제갈락전 < 諸葛恪傳 > ) ▲개주(鎧胄. 구당서 토번전 < 吐蕃傳 > ) ▲개마(鎧馬. 진서 < 晉書 > 왕준전 < 王浚傳 > ) 등의 말도 있고, 모두 갑옷과 관련된 말이다.

갑옷을 어떻게 하면 금빛이 나게 할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황금을 그대로 갑옷으로 주물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금은 속성이 물러 갑옷으로 사용하기는 힘들다. 신라 금관만 해도 무엇인가로 지탱을 해 주지 않으면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값옷에 광명(光明)을 주는 방법은 재료는 쇠로 하되, 그런 색깔을 내는 도료를 입히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백제에서 당나라에 뇌물로 바쳤다는 광명개란 전설의 갑옷은 바로 쇠갑옷에다가 황칠(黃漆)을 입힌 것임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다른 문헌기록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북송(北宋) 시대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편찬한 백과사전류인 '책부원구'(冊府元龜)라는 문헌에는 "당 태종(이세민)이 정관(貞觀) 19년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 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 황칠)을 요청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으로 백제로는 의자왕 재위 9년째가 되는 해다.

삼국사기 무왕 조에서 말하는 연대와 20년 가량 차이가 있지만 본질은 같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두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당나라에서는 무왕이 바친 명광개를 한참 탐내다가 의자왕때는 아예 사신을 보내서 황칠을 달라고 조른 것이다.

황칠은 야생에서 자생하는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수액(樹液)을 가공한 칠을 말한다. 통상 칠이라면 붉은빛을 내는 주칠(朱漆)이나 검은색을 내는 흑칠(黑漆)을 생각하기 쉽고 실제 이런 칠이 가장 흔했으나, 황칠은 그 희귀성 때문에 중국에서도 이처럼 탐을 낸 물품이었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 백제 조에는 "백제에는 섬이 세 개가 있으니 그곳에서 황칠이 난다. 6월에 칼로 그어 수액을 채취하니, 색깔은 황금색이다"고 했다.

중국측에서 이렇게 백제산 황칠을 특별히 언급한 까닭은 그것이 중국에서도 구하기가 매우 힘든 특산품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런 한반도산 황칠은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중국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12세기 초 고구려 숙종 무렵에 송(宋)나라에서 보낸 사신단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는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당시 통용된 고려말을 사전처럼 풀어놓았는데 그 중에서 "칠을 (고려사람들은) 황칠이라 부른다"(漆曰黃漆)라고 했다.

나아가 같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황칠이 나주(羅州)의 조공품이다"고 했다. 여기서 나주는 지금의 전라도 나주일 듯도 하지만 나주라는 지방에서 중국에다가 직접 조공하기는 힘든 까닭에 신라(新羅)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고려에서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수액을 채취하니 그 빛깔은 금과 같으며 볕에 쬐어 건조시킨다. 본래는 백제에서 났으나 지금은 (중국의) 절강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신라칠'(新羅漆)이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삼국시대에 황칠은 한반도에서는 백제의 도서 지역 생산품이 널리 알려졌다가 그곳을 나중에 신라가 점령하고는 중국에다가 특산물처럼 바치거나 팔았으며, 그런 전통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오직 한반도 남부 해안지대에서만 생산되던 '전설의 도료' 황칠은 이후 멸종되다시피 했다. 중국의 연이은 황칠 조공 요구에 시달린 주민들이 못살겠다며, 황칠나무들을 뽑아버리고 베어 없앤 것이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전남 해남에서 기적적으로 야생 황칠나무가 발견됨으로써 재생의 길을 열었으며, 그에 더해 경주 황성동 계림 북편 신라시대 제사 유적에서 그런 황칠 안료를 담은 유물까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황칠이 백제만의 특산이 아니라 신라 또한 생산했을 가능성을 유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