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

< 환희와 좌절이 교차한 해방의 공간들 >

엑칼쌤 2010. 8. 24. 06:57

환희와 좌절이 교차한 해방의 공간들

 


광복군 선발대 4명 여의도 착륙했다 日軍에 막혀 되돌아가

옛 동대문운동장터에선 김구 등 臨政요인 개선환영 행사도

일본의 식민지배는 조국 강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풀 한 포기, 길가의 포석 하나에까지 식민지배의 흔적이 남았다. 민족이 입은 정신적 내상(內傷)의 크기는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 1945년 8월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된 독립지사와 환호하는 군중.

↑ 고난의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서대문형무소는 현재 역사관으로 바뀌었다.

 

↑ 1945년 9월 9일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

 
 
1945년 8월 15일 정오,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 라디오에서는 잡음이 지직거리는 가운데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 신민에게 고하노라"로 시작되는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 방송이 흘러나왔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남산 기슭의 통감 관저로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찾아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지 서른여섯 해 만이었다.

식민통치의 종언 - 세종로, 경복궁, 광화문

히로히토의 항복선언이 방송된 8월 15일, 조선총독부 관리들의 움직임은 예상외로 차분했다. 총독부 핵심 당국자들은 이미 며칠 전 도쿄로부터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조선 해방의 내용을 담은 포츠담선언 수락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되찾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16일부터였다. 3ㆍ1만세 시위의 현장이었던 종로를 비롯해 경성역(서울역) 광장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라도 "만세"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총독부, 부민관(서울시의회), 경성부청(서울시청) 등 식민통치의 주요 기관들이 모여있던 광화문통(세종로)에도 태극기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일본의 항복은 8월 15일이었지만 일본의 식민지배가 공식적으로 종지부를 찍은 날은 9월 9일이다.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재조선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38도선 남쪽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과 시정권(施政權)을 이양한다는 내용의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질곡의 식민통치는 종언을 고했다. 오후 4시20분. 총독부 정문 앞의 일장기가 내려가고 미군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성조기가 게양되자 광화문통에 모인 조선인들의 박수소리와 환호는 그치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65년이 지난 2010년. 세종로 일대의 식민통치의 쓰라린 기억들은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경복궁 홍예문을 철거하고 1926년 신축됐던 조선총독부는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섰던 김영삼 정부에 의해 1996년 해체됐다. 조선총독부 신축을 위해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던 광화문은 4년 8개월의 공사 끝에 지난 15일 80여년 만에 제 자리로 돌아와 위용을 되찾았다. 2030년 경복궁 복원공사까지 마무리되면 1910년대 일제에 의해 철거됐던 경복궁의 아름다운 전각들도 제모습을 찾을 것이다.

해방의 감격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해방된 조국의 환희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상징적 공간은 식민지시기 4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하거나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였다.

이곳에 수감돼있던 정치범들이 풀려난 것은 16일 오전10시. 공식적인 권력 이양도 이뤄지지 않았던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들이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여운형의 막후 교섭 덕분이었다. 이미 15일 오전 엔도 류사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일본 항복 후 조선의 치안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던 여운형은 연합군이 진주한 뒤 정치범을 석방하자는 총독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당일 석방을 주장했다고 한다.

석방은 하루가 지난 16일에 이뤄졌지만 수감자들이 풀려난다는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이르는 길가는 오전부터 '혁명동지 환영'이라 쓴 펼침막 등을 든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석방된 독립운동가들을 선두로 한 시민들의 만세 행렬은 종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1987년까지도 감옥으로 쓰였던 서대문형무소는 대부분 철거되고 공원으로 조성됐다. 하지만 일부 옥사들은 1998년 역사관으로 바뀌어 살아있는 현대사의 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 관광객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올해는 지난달까지 1만9,000여명의 일본인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요즘은 식민지배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데 3ㆍ1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검찰조사자료,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으로 악명을 날렸던 종로경찰서 등과 관련된 사진들은 당시 엄혹한 시대상을 짐작케 해준다.

지난 18일 초등학생 딸, 고등학생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홍명자(48ㆍ홍콩 거주)씨는 "외국에 살기 때문에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자녀들에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며 "일본에 대한 분노를 키우는 데 그치지 말고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우리 스스로를 자성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도둑같이 온' 해방 - 여의도공원,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일본의 투항으로 해방은 찾아왔지만 함석헌의 표현대로 그것은 '도둑같이 온' 해방이었다. 광복군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미군, 영국군의 전투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전쟁을 벌였지만 국제적인 승인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 힘으로 얻어내지 못한 해방의 좌절감이 배어있는 곳은 여의도공원이다. 요즘은 알록달록한 복장의 젊은이들이 날렵하게 자전거를 지치고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머리를 식히러 나와 산책하는 시민공원이지만 이곳은 1916년부터 1971년까지 비행장으로 쓰였다. 조선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1900~1930)이 1922년 고국방문 비행을 한 곳도 여기였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 역시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해방된 조국에 첫발을 디뎠다. 미군첩보부대 OSS와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하던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은 8월 18일 낮 조국땅을 밟았다.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이들은 그러나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굴복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자서전 < 장정 > 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맡은 바 사명을 달성하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민족으로서 여간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광복군 정진군 4명은 모두 침통한 얼굴이었다." 그가 말한 '침통한 얼굴'은, 해방은 맞았으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없었던 약소민족의 처지를 웅변하는 것 같다.

"해방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질문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장소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뀐 옛 동대문운동장 터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환영하기 위해 1945년 12월 19일 이곳에서 열렸던 환영행사는 당시 해방을 바라보던 일반인들의 시각을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