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전범재판
이 재판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를 불바다로 만든 일본제국주의의 수괴를 단죄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하나였다. 도쿄재판정에는 '평화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A급 전범 28명만이 기소되었다.
교수형 판결을 받은 7명은 한 달이 지난 12월 23일 스가모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의 유골은 훗날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도록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 사형 판결을 면한 다른 전범들은 1950년에서 1956년 사이에 슬금슬금 풀려났다.
1946년 체포돼 7년형을 받고 4년만인 1950년 11월 석방된 시게마쓰 마모루 외상은 다시 일본정부의 외상으로 부임했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로 한쪽 다리가 날라간 인물이다. 최근 신격호 롯데 회장 부인의 외삼촌이라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전범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시아인 2,000만 명과 일본인 3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른바 천황이라는 히로히토이다.
도쿄전범재판이 범죄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범죄적 공모'에 참가했느냐는 것이다. 그 시기는 1928년 1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는 날 까지이다. 이 시기에 일본의 정계와 군부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이 주연과 조연으로 이름을 날리다 수없이 교체되었다.
그 기간에 일본제국의 권력 핵심부에서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자가 바로 히로히토 한 사람뿐이었다. 이런 자가 어떻게 전범재판에서 빠져나왔을까?
◇ 맥아더사령부 "일본통치에 꼭 필요하니 히로히토를 처벌하지 말라"
자신이 처형될 것을 두려워한 히로히토는 여러 공작 끝에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를 찾았다. 1945년 9월 27일 오전 10시였다. 이미 히로히토를 전범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천황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맥아더와 그 상황을 읽은 히로히토가 벌인 일종의 '쇼'였다.
3달 후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는 "짐은 신이 아니다"라는 이른바 인간선언을 발표하면서 허리를 더 낮췄다. 여기에 발 맞춰 맥아더도 빠르게 움직였다. 곧바로 미 정부에 보내는 전보에서 천황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보고했다.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할 경우 일본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천황은 일본인 통합의 상징이다. 천황을 망가뜨리면 폭동을 제압하는데 100만 명이 필요할 것이며 그 군대를 무기한 유지해야 할 것이다."
맥아더는 왜 그랬을까?
쉽게 얘기하면 히로히토가 맥아더의 일본통치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대신, 맥아더는 히로히토의 '권위'를 이용해 일본통치를 거저 먹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래도 문제는 산적했다. 전범 1호 히로히토를 건드리지 않으면 연합군 내부나 일제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반발이 거세질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속죄양이 필요했다. 이때 차출된 인물이 바로 총리를 지낸 도조 히데키였다.
도조에게 1945년 9월 10일 시모무라 사다무 육군대신이 이렇게 설득했다.
"전쟁 책임에 대한 추궁이 시작될 경우 당신이 없으면 천황께 누를 끼치게 됩니다."
수많은 장병들을 옥쇄로 몰아넣은 죄책감과 천황에 대한 충성심 사이에서 흔들린 도조는 실패한 자살로 문제를 해결했다.
심장에서 약간 비껴간 곳에 권총을 쏴 병원을 거쳐 전범재판장으로 끌려갔다.
천황 측근과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네가 전쟁의 책임자이고, 천황은 아무 죄가 없다"는 진술을 하라고 시달리다 어느 순간 실수를 했다.
변호인의 신문 중 천황의 전쟁 책임을 시사하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로건(변호인): 평화를 바라는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기도(내대신)가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무언가 진언을 한 사례가 있었나요?
도조: 그런 사례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일본의 고관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전쟁 전반에 걸쳐 천황의 책임을 인정한다는 표현이다. 기겁한 맥아더의 충실한 참모들은 도조에게 압력을 가해 발언을 취소시켰다. 이렇게 해서 히로히토가 살아남은 것이다.
이후 옥사한 7명을 더한 14명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것이다. 이들 모두 일본 극우의 성지순례가 되고 있다.
현재 일본에는 아다미 시, 가마고리 시, 나가노 시 등에 이들 처형된 7명의 전범들을 추모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나치 전범 같았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수상 자리에 오르다
이때 석방된 기시 노부스케란 인물이 오늘날 아베 정권의 원조이다.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을 주무르다 전범으로 체포된 기시는 1958년 정계에 복귀해 수상 자리에 올랐다.
기시는 3년 동안의 총리 재직기간을 포함한 7년여의 길지 않은 시간에 미국의 뜻대로 전후 일본정치의 방향을 정한 보수합동 체제(55년 체제)를 만들었다. 기시 수상 밑에서 일본 전범들이 모두 역사의 무대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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