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

< 정치 암살,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

엑칼쌤 2016. 8. 12. 13:14

정치 암살,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8·15 광복, 기쁨은 컸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제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각 정치세력은 각개약진하며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지를 두고 격렬하게 투쟁했다. 미군, 소련군의 진주는 정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정치 암살은 혼란의 극단적 형태였다.


현준혁,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이들이 암살의 대상이 된 이유, 사건이 역사에 갖는 의미. 암살사건의 배경과 배후를 추적하는 것은 이 시기 역사의 이면을 파헤칠 뿐만 아니라 통일이 아닌 분단으로 귀결된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 공권력의 핵심 경찰, 암살 의혹의 중심에 서다

갈등의 두드러진 양상은 좌·우익의 대립이었다. 흔히 암살을 양 진영 갈등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해방공간의 정치암살을 정치세력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그 근거 중 하나로 경찰이 주요 테러, 암살의 배후로 매번 거론되었다.

보수적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 송진우는 남한에서 암살된 첫 번째 주요 정치인이었다. 그는 1945년 12월 30일 자택에서 총을 맞고 숨졌다.

사건 해결 과정에서 경찰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인다. 경찰은 이듬해 4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직감’으로 암살범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한다는 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 암살범들이 “범행 당시 사용한 권총을 경찰 당국에 바친”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암살범들이 범행 도구를 경찰에 바쳤다는 것, 총을 받고도 경찰에서 아무런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 모두 납득하기 어렵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이끌었던 여운형 암살 사건에서 경찰의 등장은 더 또렷하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었을 때 경호원이 범인을 뒤쫓았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경찰이 경호원을 끌어안았다. 경찰도 범인을 쫓고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범인은 사라졌다. 미군정은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이 여운형의 암살을 기도한 사람들은 체포하지 않고 경호원을 범인으로 몰아가려 한다”고 판단했다.

공권력의 축인 경찰의 ‘정치 암살’ 개입은 해방 정국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암살의 배후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난관을 조성했으며, 배후 규명, 처벌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이후 우리 정치사에서 발생한 많은 암살과 테러, 의문사에 또다시 공권력이 동원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 빠지지 않은 이름, ‘김구와 이승만’

책은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암살사건의 ‘중요한 공통점’ 중 하나로 “김구, 이승만이라는 최고 지도자의 이름이 항상 거론되었다는 사실”을 꼽았다. 굵직한 정치이슈의 중심에 있었고, 희생자들과는 직간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1947년 12월 2일 발생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 암살은 대표적인 사례다.

장덕수의 죽음은 미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미군정의 의지대로 정국을 이끌 한국측 파트너로 장덕수를 꼽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전례없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고, 배후로 김구를 지목해 법정에 세웠다. 미군정, 한국민주당과 대립하며 남한 단독선거에 불참하고, 남북연석회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시점에 재판에 불려나와 암살의 배후로 거론되면서 김구가 입은 정치적 타격은 컸다.

미군정은 이승만에게도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군정 책임자인 하지 중장이 “이승만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는 미군정 문서는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이승만은 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장덕수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앞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이승만에게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은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과 같은 결과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지도자는 이승만이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도자는 김구였으며,  장덕수의 죽음 직후 이승만은 별다른 무리 없이 단독정부의 정권을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