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의 생일상에 날아간 승리, 황해전투
숱한 외세와의 전쟁을 겪었던 중국이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전쟁은 1894년 발발했던 청일전쟁이다. 유독 이 역사가 더욱 부각되는 이유는 도저히 질 수가 없는 전쟁을 졌기 때문이다. 특히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었던 황해전투에서 압도적인 전력상 우위에 놓여있던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가 일본 함대에 박살이 나면서 중국은 아시아의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보통 청일전쟁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군이 전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청나라군을 압도적으로 패배시킨 전쟁으로 인식돼있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제 2차 아편전쟁 당시 수도 베이징이 함락되는 굴욕을 당했던 청나라는 1861년 이후 30년에 걸쳐 군비 개혁을 실시해 1890년대에는 아시아 최강의 함대라 알려진 북양함대를 키워낸 상황이었다.
이에비해 일본은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도쿠가와 막부와의 내전, 1877년 발생한 세이난전쟁 등 일대 내전을 수습한 뒤 짧은 기간동안 해군을 키워냈다. 프랑스 해군을 본받아 프랑스식으로 함대를 만들었던 막부와 영국식 함대를 만들던 메이지 정부군이 합쳐진 이후 한동안 이를 통폐합하고 해군을 건설하는데 여러모로 애를 먹었다. 예산규모도 청나라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에 거대 전함을 운용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함대 규모 차이가 심했다. 1884년부터 1885년 사이 북양함대가 연이어 도입한 독일제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7000톤급의 배수량을 자랑하는 거함이었다. 이 함선은 당시 개발국 독일도 해군에서 예산부족으로 도입하지 못한 함선이었다. 이에비해 일본의 기함인 마츠시마는 배수량이 4000톤급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배들도 3000톤급에 그쳤다. 1891년 청나라 함대가 일본에 친선방문 했을 때 일본 해군 지휘관들이 패닉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렇게 압도적 차이가 나는 북양함대는 도대체 왜 패배했을까?
해답은 당시 중국 천하를 뒤흔들던 한 여성의 '생일상'과 관련돼있다. 1894년은 당시 청나라의 막후 통치자인 효흠현황후 예허나라씨(孝欽顯皇后 葉赫那拉氏), 보통 자금성 서쪽 거치에 살다보니 붙은 별칭인 '서태후'로 훨씬 유명한 자희태후의 환갑 생일잔치가 있는 해였다. 당시 섭정 황태후로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쥔 그녀의 생일상에는 청나라 예산의 6분의 1에 맞먹는 1000만냥의 세입이 소용됐다. 여기에 이 축하연에 맞춰 2차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와 영국군에 약탈돼 박살난 이화원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도 들어갔다. 여기에 들어간 돈이 또 3000만냥에 이르렀다.
전 국력을 기울여 전쟁을 준비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오히려 절대 권력자의 생일파티를 대대적으로 준비하다보니 군비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동양 최대 함대라는 북양함대에도 여파가 미쳤다. 정원과 진원의 주포는 탄약이 부족했고 포문당 포탄은 3발 정도만 간신히 확보돼있었다. 주요 함선의 포탄 역시 제대로 된 포탄은 하나도 없었으며 대부분 포탄 안에는 모래나 콩만 차 있었다고 한다. 이런 함대가 제대로 된 사격 훈련을 받았을 리가 만무했다.
이 막대한 서태후의 생일파티 준비로 청나라는 중요한 무기 구입 기회도 놓쳤다. 청일전쟁 발발 3개월전, 영국이 청나라에 최신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했지만 서태후의 생일 축전 비용으로 써야한다는 이유로 이 계약건이 물건너간다. 그러자 일본이 바로 이 순양함 2척을 사들였고 이 순양함은 청일전쟁에서 대 활약을 펼쳤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북양함대의 수장인 이홍장(李鴻章)은 부하 장수들에게 최대한 소극적 전투를 벌일 것을 주문했다. 대양에서 맞서지 말고 전세가 기울 것 같으면 곧바로 해안지대로 피신하라는 명령에 따라 실제 황해에서 양군이 맞붙었을 때도 제대로 싸운 전함은 거의 없었다.
극동 최고의 함선인 정원과 진원은 그래도 비싼 값은 했다. 159발의 명중탄을 맞고도 건재해 퇴각했으며 퇴각 과정에서 역으로 일본의 기함인 마츠시마를 포탄도 몇발 없는 주포로 명중시켜 대파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퇴각하다가 포위된 함대는 저항능력을 상실한 채 전멸했고 정원은 자침당했고 진원은 일본군에 의해 나포돼 일본 해군의 훈련용 함선이 되고 만다.
서구국가도 아니고 중국보다도 훨씬 작고 근대화도 함대 건설도 모두 뒤늦게 시작한 일본에 패배한 청나라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이후 중국을 더욱 우습게 여기게 된 외세의 침략도 한층 심화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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