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로 불린 中 소수민족의 역사
기원전 3세기 이곳에 살았던 유목민족이 식량을 얻는 방법은 농사를 짓고 사는 초원민족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유목민족이 초원민족을 습격하는 횟수가 늘면서 점차 전쟁의 양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원민족이 유목민족의 기마부대를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때문에 초원민족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목민족을 비하하고 멸시했다. 훗날 초원민족은 중원에서 문자를 발명하고 역사편찬의 권리를 갖게 되면서 유목민족에게 모욕적인 이름을 붙였다. 전국시대에는 사람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흉노’(匈奴)라 불렀고, 진한시기에는 더욱 강한 멸시의 의미를 담아 ‘호’(胡)라 불렀다.
진나라를 세운 진시황은 “진(秦)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흉노)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79만명의 군대와 백성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사진은 만리장성의 9대 관문 중 하나인 안문관. |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인 왕소군은 혼인을 통한 화친을 위해 흉노로 시집을 갔다. 사진은 내몽골 왕소군의 무덤에 서 있는 왕소군의 동상. |
그러나 이 시기의 흉노는 서역으로 시선을 돌려 26개 왕국을 복속시켰다. 한 고조 6년에는 한신을 투항시키고 만리장성을 넘어 진양을 점령했다. 이듬해 유방은 보병 32만명을 이끌고 흉노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흉노의 왕 묵돌은 40만 기병으로 이들을 포위했다. 유방은 황실의 여인을 흉노로 보내 외교적 관계를 형성했는데 훗날 ‘화친(和親)정책’의 시초였다.
초원의 주인이 된 테무친은 몽골을 9만5000호로 나누어 귀족과 공신들에게 나눠 줬다. 직접 통제한 1만명의 친위대는 신임하던 4명의 장군에게 줬다. 몽골은 빠른 속도로 세계제국을 만들었고, 이들의 기병 앞에 중국의 중원과 유럽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중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칭기즈칸의 육포 > (0) | 2018.01.18 |
---|---|
< 동영상-중국군 총동원대회 > (0) | 2018.01.04 |
< 황후의 생일상에 날아간 승리, 황해전투 > (0) | 2017.01.24 |
< 동영상-의화단 운동. 청, 열강에 선전포고 (1900) > (0) | 2016.07.27 |
< 동영상-진시황 병마용갱 발견 (1974) > (0) | 2016.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