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사

< 예루살렘 >

엑칼쌤 2018. 3. 10. 08:24

예루살렘



중동 내 화약고의 원점 예루살렘.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과 억울함 가득한 눈을 가진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대립. 


* 일방주의가 일으킨 또 다른 긴장


복잡한 예루살렘의 정세와 정서에 다시 뜨거운 기름이 부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한 것이다. 행정도시 텔아비브에 소재한 미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도 지시해 분쟁 당사자로 볼 수 있는 아랍 및 이슬람권은 물론 국제사회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국제법은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를 인정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권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합의다. 이스라엘은 1948년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 서부를 장악한 데 이어 1967년에는 동예루살렘까지 차지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에 점령지에서 철수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여러 차례 내놓았지만 번번이 먹히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슬림 간 갈등은 유럽에서 억압받던 유대인들 사이에 시온주의가 등장하면서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이주가 시작된 19세 말부터 본격화됐다. 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제국의 분열로 영국이 위임통치하던 기간에는 대규모 이주가 이어졌고 팔레스타인 거주 무슬림들과의 유혈충돌은 한층 거세졌다.


결국 유엔 총회는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채택했다. 유대인 중심의 이스라엘과 무슬림 중심의 팔레스타인을 별개 국가로 세우자는 것이었다. 당시 분할안은 예루살렘만큼은 국제사회 관할 지역으로 남겨놓았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의 중요 성지임을 고려한 조치였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점유권을 인정했으니 동예루살렘을 점령당했다고 생각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 예루살렘의 어원 '이루 슐라임'


예루살렘은 이해 당사자의 생존과 3대 중동 종교의 자존심이 교차하는 곳이다. 이곳은 사해와 지중해 사이의 황량한 사막 속 오아시스였다. 언덕에는 나무가 자라고, 골짜기에는 샘이 솟는다. 약 5천 년 전 가나안 인이 정착해 도시를 건설했다. 사막의 유목민에게는 최적의 삶을 제공했다. 주민은 풍족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곳을 '이루 슐라임'이라고 불렀다.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로 예루살렘의 어원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요지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도시는 모든 세력에 매혹적인 곳이었다. 3천300여 년 전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인들도 주변에 정착했다. 유대왕 다윗은 왕국을 건설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다. 솔로몬왕은 성전을 건설했다.


그러나 바빌론 제국 등에 멸망하면서 많은 유대인이 바빌론 제국의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갔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도시를 다시 일으키고 성전을 재건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과 알렉산더 대왕의 연이은 정벌로 쇠락했다. 이후 로마제국은 다시 성전을 파괴하고 항전하는 유대인을 학살하고 추방했다. 이렇게 1천 년 이상 유럽과 중동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정신적 수도였다.


* 성지를 둘러싼 충돌의 초점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에 등장한 기독교에서도 예루살렘은 신앙의 중심지였다. 사랑을 전파하며 헐벗고 소외당한 자들을 이끌던 예수가 입성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로마 통치세력과 유대인 기득권 세력 모두의 적이었다.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로마 통치자에게는 반군 세력이었고, 유대인만이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 지도 세력에게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예수의 주장은 심각한 도전이었다.


예수는 도시 입성 후 3일 만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예수가 피를 흘리며 하나님 곁으로 간 도시 예루살렘은 기독교 최대의 성지일 수밖에 없다. 11세기 말부터 약 200년 동안 십자군 원정대가 성지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워 무슬림이 지배하던 예루살렘 탈환전쟁에 나선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유대교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슬람 신도인 무슬림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중대한 성지다. 이슬람 초기에는 무슬림도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행했다. 신성이 전혀 없던 인간 지도자로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유일하게 행한 기적은 예루살렘을 밤에 방문해 하늘로 승천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서기 7세기 출범한 이슬람 국가는 20년도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 정벌에 나서 장악했다. 종교적 열정이 담긴 중대한 정복사업이었다. 이후 20세기 초 이슬람을 신봉하는 오스만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도시였고 신앙의 중심지였다.


* 다채로운 역사 간직한 예루살렘 올드시티


현대 대도시로 성장한 예루살렘 동부 지역에는 고대부터 존재한 올드시티(구시가지)가 위치한다. 성벽 밖 현재의 시간과는 다른 3천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올드시티는 면적이 0.9㎢에 불과하다. 작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16세기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제국의 술레이만 대제에 의해 완성됐다. 도시 내부는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관할돼 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아르메니아 정교 구역이다. 네 구역 사이에 물리적 장벽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각각의 종교적 열망과 아픔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통곡의 벽 전경



*  전 세계 유대인이 찾는 통곡의 벽


올드시티 남동쪽에 위치한 유대교 구역은 차분하고 엄숙한 지역이다. 종교색이 짙은 약 5천 명의 유대인이 거주한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경건함이 가득하다. 머리에 키파(kippah)라는 작은 천을 얹고 다니는 신실한 유대인이 많다. 때로는 검정 코트와 중절모를 쓴 정통주의 유대인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외국인을 맞이한다. 그리고 소총을 둘러멘 정복과 사복의 군인들이 매서운 눈초리로 지나는 사람을 감시한다. 긴장 속의 경건함이 유대교 구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 구역 동쪽의 높은 담벼락 주변에는 종교적 열정과 감흥이 넘친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이 있기 때문이다. 통곡의 벽은 전 세계 유대인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성지다. 이곳에서는 역사적 아픔을 되새기며 벽에 가까이 머리를 파묻은 채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격렬한 기도를 행한다.


간절함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통곡을 한다. 통곡의 벽 위의 성전산(Temple Mount)은 모두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이다. 유대왕국의 솔로몬왕과 헤롯왕이 제1, 2 성전을 건설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로마제국 시절 모두 파괴되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은 흔적은 통곡의 벽을 이루는 담벼락뿐이다. 유대인들이 세계를 떠돌아야 했던 디아스포라(이산)를 잊지 않도록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상징물이 통곡의 벽이다.


예루살렘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의 역사적 아픔. 그리고 번영을 상징하는 도시다. 1947년 유엔 총회가 국제사회의 관할 지역으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일방적인 영유권이 주장된다면 더욱 큰 아픔이 다른 민족이나 종파에 전가될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은 그래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중재가 필요한 시점이다. 예루살렘은 인류가 고이 간직해야 할 공존의 종교역사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