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군 '처절한 전쟁'
당시 동학농민군의 병력은 관군, 일본군으로 구성된 진압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으나 무기의 큰 격차로 인해 패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1894년 봉기 당시 외무대신이던 김윤식은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군 1명이 비도(匪徒·동학농민군) 수천명을 상대할 수 있고 경병(京兵·관군) 10명이 비도 수백명을 상대할 수 있다”며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계(무기)가 예리한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적었다. 김윤식의 인식이 과장된 것이기는 하나 무기의 차이는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변수인 것은 분명했다.
이해 10월 23일 벌어진 이인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수만명’에 달하는 호대한 군세”였으나 일본군, 관군의 신식소총 앞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관군은 최대 사거리가 1.6㎞에 달하는 신식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동학농민군은 겨우 수백명이 화승총을 지녔고, 대부분은 “칼이나 창을 들고 싸웠거나 빈손으로 같이 다녔을 뿐”이었다.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우금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황을 담은 기록은 “일본인 군관이 군사를 나누어 산허리에 나열하여 일시에 총을 발사하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또 산허리에 올라 일제히 발사하였는데 40, 50 차례를 이와같이 하였다.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고 전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동학농민군은 “종일 출몰하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하면 올라와서 시험해보고, 총을 쏘면 몸을 섬광과도 같이 번쩍 피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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