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학살 사건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서 일어난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사건’.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경부선 철로 위에서 피난 중이던 주민들을 총으로 쏘아 사살했다. 공중폭격과 지상군 사격을 동반한 무차별 학살은 3박 4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에 달했다. 게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노근리 사건은 <조선인민일보>가 1950년 8월19일치에 처음 보도한 이후 44년 동안 언론 매체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노근리 사건이 수십 년간 묻힐 수 있었던 데는 사건 가해자들의 조직적인 은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으로 남을 것 같았던 노근리 사건은 1994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 실록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출간된 이후 국·내외적으로 큰 사건으로 부각되었다.
* 44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한 달 뒤 일어난 사건이다. 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이면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여러 물리적, 기술적 어려움이 존재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한국전쟁 동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일부 신문들은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도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노근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건 피해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첫 시작은 사건이 발생한지 10년이 지난 1960년이었다. 노근리 사건으로 아들과 딸을 한꺼번에 잃은 정은용씨는 주한 미군 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또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절 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준’ 은인인 미군의 범죄는 감히 꺼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정권이 바뀌자 군 진급 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은 사건을 철저히 은폐했고, 언론은 노근리 사건을 뉴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사건은 ‘금지된 이야기’가 되어 역사의 어둠 속으로 묻히는 듯했다.
* 한·미 합동 조사
1999년 10월 초, 당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진술과 참전 군인들의 증언이 큰 틀에서 일치되고 있는 만큼 한·미 합동 조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사건이 자행된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봤다. 조사단은 이어 피해자와 유족 6명으로부터 50여 분 동안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미 조사단 전체회의를 열어 노근리 사건의 진상조사 작업을 이듬해인 2000년 상반기까지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쪽 실무조사단의 방문과는 별개로 당시 주민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증언한 미군도 50여 년 만에 사건 현장을 찾았다. 에드워드 데일리 중위는 사건 현장인 쌍굴다리 주위와 경부선 철로 위를 둘러보고 굴다리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도 살펴봤다. 그는 이날 “어린이와 노약자를 쏘라는 명령을 차마 따를 수 없어 굴다리 벽 쪽으로 총을 쐈다”며 “평생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데일리 중위는 피해자와 유족 등을 만나 회한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데일리는 이 자리에서 “1950년 7월26일 미군 전투기가 철길 위에 있던 400~500명의 피난민을 폭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어린이와 여자, 노인이 있는데 명령이 확실하냐”고 반문했으나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덧붙였다.
* 미군의 ‘발뺌’과 미국 대통령의 ‘유감 표명’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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