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의 김대중 납치살해 시도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 독재통치를 시작하던 72년 10월 17일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그는 해외에 머물면서 유신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주로 미국에 머무르며 반정부 활동을 전개한 그는 일본 안의 유신반대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73년 7월 10일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73년 8월 8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당시 통일당 총재이던 양일동이 묵고 있던 호텔 그랜드 팔레스 2212호실에서 양일동과 당시 통일당 국회의원 김경인을 만난 뒤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김경인과 함께 방문을 나섰다.
김대중을 덮친 괴한 중 1명이 마취약에 적신 손수건으로 김대중의 코를 틀어막으며 2210호실로 끌고 들어갔고 괴한들은 그의 목을 짓누르며 두 손을 뒤로 꺾어 로프로 묶으면서 유창한 한국말로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잠시 뒤 괴한들은 그를 끌고나와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호텔 지하실로 내려갔다.
▲ 일본 납치 직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일본 납치 직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김대중을 납치한 괴한들은 호텔 지하주차장을 통해 승용차편으로 어디론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차는 요코하마 주재 한국총영사관의 부영사 유영목의 것이었고, 당시 승용차 조수석에는 김동운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오사카나 코베 근처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얼굴을 포장용 테이프로 감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 보트에 태워 30~40분쯤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대형 선박에 옮겨싣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인계했다. 이 배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536톤짜리 용금호이다. 용금호는 그해 7월 29일 일본에 입항하여 그곳 외항에 정박해 있었다.
▲ 73년 납치 기자회견 당시 김대중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납치되었다가 동교동 집 앞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얼마 후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을 느낌과 동시에 굉음을 들었다. 그 순간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면서 뛰쳐나갔고 배는 매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의 폭음소리도 되풀이 되었다. 이런 상태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김대중은 어느 항구에 도착하여 앰뷸런스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이 들었다. 잠을 깬 순간 2층 양옥에 갇혀 있었다. 다시 어두워진 다음, 승용차에 태워져 몇 시간 후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 내려졌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저녁 10시 30분경 그는 집으로 끌려왔다.
나중에 김대중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중이 해외에서 유신체제를 계속 비판하면서 73년 7월 6일 재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 초대 명예회장이 되고 일본에서도 8월 13일 도쿄 한민통의 결성을 준비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납치 살해를 중앙정보부에 지시했다는 것이다.
▲ 납치생환 직후의 김대중 73년 8월 당시 납치 생환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위로하는 고 정일형 박사. 김 전 대통령의 야윈 팔이 도쿄에서 납치되어 서울에서 풀려나기까지 3박4일 동안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국권침해'에 대한 비난여론이 대두하고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냉각상태에 빠져 들었다.
이후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간의 막후절충을 통해 관계정상화가 시도되어 △김동운 1등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 등에 합의, 사건 발생 86일 만에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결말지어졌다.
그러나 사건 당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훗날 "73년 봄 박정희가 나를 불러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나는 곤혹스러운 나머지 실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김종필과도 이야기되었다면서 다시 명령을 내렸다. 김대중을 납치한 것도 나지만 살려준 것도 나다"라고 밝혀, 어느 정도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은 본질이 최고 권력자의 정적제거 음모임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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