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성산리 산성은 해안 방어기지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에서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한성백제군 군사기지의 막사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됐다. 길이 239m에 이르는 성벽은 해발 67m의 야산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다. 야산의 자연경사면 위에 흙과 잡석을 켜켜이 쌓아 축조한 테뫼식(산 정상부를 둘러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규모는 높이 5.3m 정도에 너비 약 14m이다. 5열 정도의 나무기둥을 110㎝ 간격으로 박아 고정시킨 뒤 그 사이를 적갈색 점토로 다져 쌓는 기법으로 축조했다. 이렇게 주변의 흙을 이용해서 일정 높이까지 쌓아올린 다음 마감 높이에서 두들겨 일정한 성벽의 형태를 유지하는 축조방법을 ‘성토(盛土)기법’이라 한다.
이들 건물의 평면은 대부분 네모꼴이었지만 그중 1기는 한성백제 주거지의 전형적인 형태인 철(凸)자형이었다. 이 건물지들은 암반 위에 조성됐고, 성벽에 매우 가깝게 붙어 열을 지어 있었다. 또한 구들시설을 구축해서 계절에 관계없이 취사와 난방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굳이 축조하기 어려운 암반 위에 사철 난방과 취사가 가능한 건물을 열을 지어 축조했다. 성벽에 붙여 조성한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이 건물들은 군막일 가능성이 크다.
군막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세발 달린 그릇(삼족기·三足器)과 굽다리 접시(고배·高杯), 계란모양(장란형·長卵形) 토기, 시루, 실을 뽑을 때 사용한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등 취사 및 생활용 토기와 쇠도끼 등 200여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이면 근초고왕(재위 346~375)과 그 아들인 근구수왕(375~384), 손자인 침류왕(384~385)·진사왕(385~392)과 아신왕(392~405), 전지왕(405~420) 시대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가 바로 백제였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공격을 받아 58성 700촌을 빼앗기는 등 국력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아산만 초입에 조성된 성산리 산성은 한성백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의 치열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전략적인 요충지에 축조한 해안 방어기지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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