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을 둘러싼 각축전
* 동북아시아 철도전쟁
러시아는 극동 진출 교두보로 일찍이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를 구상한다. 1887년 노선측량을 마치고, 프랑스 도움을 받아 마침내 1891∼1892년 착공에 들어간다. TSR은 특히 영국과 일본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온다. 만주와 한반도가 이들 사이 다툼의 중심으로 부상함은 물론, 1902년 체결된 영·일 동맹이 구상되어 진 직접적 계기다.
러시아 주도로 삼국간섭이 관철된 후, 1896년 러시아-청나라가 밀약을 맺는다. 대가로 러시아는 동청철도(東淸鐵道, 치타∼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 부설권을 얻는다. 아울러 1898년 3월엔 동청철도 지선인 남만주철도(하얼빈∼선양∼대련)마저 얻게 된다. 그러자 영국과 일본이 다급해진다.
* 서로 다른 생각
경의선은 러시아에겐 한반도로 남하하는 길이고, 일본에겐 대륙으로 나가는 길이어서 피차간 반드시 거머쥐어야 하는 철도다. 러시아는 남만주철도를 서울까지 연결할 구상을, 일본은 경부+경의선을 러시아가 건설하는 남만주철도와 교차해 영국이 건설하는 경봉철도 잉커우(營口)역까지 연결(영의철도(營義鐵道))할 구상을 한다.
하지만 조선의 생각은 다르다. 1896년 5월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프랑스 피브릴 사(社)에 준다. 7월에 한국철도 규칙을 제정, 한반도 내 철도 규격을 표준궤로 정하는 방침을 세운다. 하지만 이는 아관파천 후인 11월, 러시아 영향으로 광궤로 바뀌게 된다. 이에 일본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경의선 부설권을 얻은 피브릴 사는 투자자 모집에 실패하고 시간을 허비해, 약속한 착공 일자(1899년 7월 이내)를 지키지 못할 상황에 직면한다. 프랑스 자금이 투입된 시베리아철도와 동청철도 등으로 러시아는 자본 여력이 없다. 이에 피브릴 사는 1899년 5월 일본에 부설권 양도 의사를 밝힌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 기구로 9월에 서북철도국을 설립하여 직접 시공에 나선다. 엄청난 자금압박과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이용익(李容翊) 주도로, 피브릴 사 측량 결과와 기술자를 승계하여 1902년 3월 협궤(표준궤보다 좁은 궤도)로 서울∼개성 간 노반공사를 시작한다.
* 음흉한 일본
하지만 자본과 기술이 없는 서북철도국이 원만히 공사를 완료되지 못하리란 전망은 일반적 인식이었다. 이에 일본은 일본제일은행을 동원, 부설권을 가진 철도회사에 부족자금대여 방식으로 회사를 장악할 계획을 짠다. 그러나 공사는 서북철도국이 주도하는 중이고, 철도회사는 1904년 7월 이내 착공해야 권리가 인정되는 실정이다. 예상대로 1903년 1월 서북철도국 공사가 중단된다.
한편 1903년 2월 16일, 러시아가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한국에 요청한다. 일본은 물론 철도회사도 강력하게 반대한다. 한국은 4일 만에 러시아 요구를 거절하나, 다급해진 일본이 3월 10일 철도회사와 출자계약을 성사시킨다.
철도회사와 서북철도국이 서울∼개성은 철도회사가, 개성∼의주는 추후 협상하기로 합의한다. 9월 8일 철도회사와 일본 간 차관계약이 이뤄진다. 이 계약에 따라 경의·경원선 부설권을 일본이 완전하게 장악하게 된다.
* 러·일전쟁 도화선
동북아에서 철도를 놓고 다투던 싸움이 러·일 간 협상으로 귀착된다. 1898년 5월 러시아가 획득한 남만주지선∼압록강 간 철도 부설권은 일본의 영의철도 노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일본 또한 경원선을 연장, 길림에 이르는 철도와 아울러 경의·영의철도를 관철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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