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 고구려를 키운 나라, 동부여 >

엑칼쌤 2022. 10. 1. 16:18

고구려를 키운 나라, 동부여

 

 주몽과 동부여 태자 대소(帶素)의 대결은 주요한 갈등 구조다. 따지고 보면 이 두 사람 사이 갈등의 연원도 그 선대로 올라간다.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본래 해부루가 터 잡고 있던 북부여를 차지했고, 해부루는 천제(天帝)의 명에 의해 자신의 본거지를 내주고 동쪽 가섭원 땅으로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다시 세웠다. 해모수와 해부루가 직접 만나 갈등을 겪은 적은 없지만, 해부루 입장에서는 자신의 건국지인 북부여 땅을 내준 게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 게다.

 

해부루가 동부여로 이주한 뒤에 북부여 땅에는 해모수가 도읍했다고만 전할 뿐, 그 뒤 북부여라는 나라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해서 주몽 전승에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다. 정작 해모수의 혈통을 잇는 주몽은 북부여가 아닌 동부여 땅에서 태어나게 된다. 해모수와 사통하였다는 이유로 하백에 의해 유화가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해부루의 계승자 금와왕이 그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동부여 입장에서는 본래 북부여 땅도 내주었는데, 해모수의 아내와 그의 아들 주몽까지 동부여에서 거두고 키운 셈이다. 그런 점에서 해부루의 손자이자 금와왕의 첫째 아들인 대소의 입장에서는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이 그리 달가울 리 없지 싶다. 게다가 주몽이 선사(善射)의 재능과 같은 신이한 능력을 갖고 있으니, 대소 태자가 질투심을 갖게 되고 주몽을 시기하고 견제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도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북부여 땅도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에게 내주었는데, 이 동부여를 또 주몽이 차지하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할 만하다.

 

 

주몽과 대소 태자의 갈등 과정에서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했으니까 일단 대소의 뜻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여군의 추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주몽은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기에, 이제 두 사람의 충돌은 국가 대 국가의 충돌 가능성으로 여전히 남게 되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왕으로 재위한 지 14년(서기전 24) 8월에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사망하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워 주었다. 금와왕은 유화와 주몽에게 끝까지 후의를 베푼 것이다.

 

 

그리고 주몽 재위 19년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로부터 어머니 예씨와 함께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고 9월에 사망하였다. 여기까지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는 주몽 전승의 내용이다. 주몽의 아내 예씨와 아들 유리는 14년 가까이 동부여에 있었으니, 그 기간에 시어머니이며 할머니인 유화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유리 전승에서 전혀 언급이 없다. 전회에서 필자가 소개한 바와 같이 유리와 주몽이 의제적인 부자 관계로서 유리 또한 또 다른 시조 전승의 주인공이라고 본다면, 이들과 유화 사이는 남남인 셈이니, 유리 전승에서 유화의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따라 동부여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동부여 금와왕에서 대소왕으로 왕위가 언제 이어졌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 유리왕에게 사신을 보내 위협한 때가 유리왕 재위 14년(서기전 6)이었다. 그해 11월에는 동부여 5만 군사가 고구려를 침공했다. 즉 금와왕은 서기전 24년에서 서기전 6년 사이에 사망한 셈이다. 다만 주몽에게 우호적이었던 금와왕의 태도를 고려하면, 그의 사망은 서기전 6년에서 그리 머지않은 시점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대소왕은 아버지 금와왕과 달리 고구려에 대해 시종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리왕 재위 14년, 28년, 32년에 사신을 보내 위협하거나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다. 물론 그 대응 과정에서 유리왕보다는 왕자 무휼(대무신왕)의 활약이 돋보인다는 점도 언급했다.

 

고구려와 동부여 관계의 전환점은 대무신왕이 즉위하면서부터다. 그 역시 동부여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동부여 대소왕과 맞수가 된 셈이다. 대무신왕은 재위 4년 12월에서 5년 2월에 걸쳐 동부여 정벌에 나섰다. 이 원정에서 괴유(怪由)가 대소왕을 참수했지만, 부여군의 포위에 고구려군은 곤욕을 치르다가 가까스로 회군하였다.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전황을 보면 결코 고구려군의 승리라고 할 수 없었다. 비록 대소왕이 전사했지만, 동부여는 그리 큰 위기를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동부여는 이를 계기로 스스로 무너져내렸다.

 

고구려군이 2월에 회군한 뒤 4월에 대소의 아우이며 금와왕의 막내아들이 1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동부여를 탈출했다. 그의 무리가 압록곡에 이르러 사냥 나온 해두국왕(海頭國王)을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에 나라를 세우고 갈사국왕이 되었다. 갈사수가 어디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일단 압록곡에서 해두국왕을 맞닥뜨린 걸 보면, 압록강의 한 지류가 아닐까 싶다.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 동생이 1만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그는 "대소왕이 죽고 왕의 동생은 도망쳐 따로 갈사국을 세웠는데, 자신은 나라를 이끌 재목이 아니다"는 겸손한(?) 명분을 내세웠다. 이 대목도 잘 납득되지는 않는다. 주몽 전승에는 금와왕의 아들이 일곱이라고 했는데, 첫째 대소왕과 막내 갈사국왕을 제외해도 다섯 왕자가 있는데, 이때는 다들 생존하지 않았다는 뜻인지, 또 대소왕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는 뜻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대소왕의 사촌 동생이라면 금와왕의 동생이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이 또한 금와왕 전승에서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처럼 주몽 전승 등과 잘 연결되지 않는 대목들은 오히려 이 기록의 현실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동부여로부터 다수의 주민들이 고구려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부여왕 종제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주민집단은 그 규모가 삼한 소국 수준이다. 그래서 대무신왕도 이들 주민들을 특별히 5부의 하나인 연나부(椽那部)에 소속시키고 부여왕종제를 왕으로 봉해 이를 통솔케 했다. 연나부는 후일 왕비족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이 동부여 주민집단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 세운 갈사국과 고구려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갈사국이 압록강 지류에 자리 잡았다면 지리상으로 고구려와 가까이 있었기에 양국은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갈사국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형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대무신왕에게 적개심을 가질 만했지만, 아마 세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갈사왕은 자신의 손녀를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으로 시집보내는 다소 굴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 혼인 시점 자체가 갈사국을 세운 직후라고 짐작되는데, 이때 갈사국왕이 장성한 손녀딸을 두었다고 한다면 그의 나이를 짐작할 만하다. 어쨌든 이 갈사국왕의 손녀가 낳은 아들이 유명한 호동 왕자이다. 호동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갈사국과 고구려의 관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태조대왕 재위 16년(서기 68)에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해 왔다. 이 도두는 호동의 어머니 갈사국왕 손녀의 형제가 된다.

 

다음 여기서 백제 비류시조 전승의 한 대목을 다시 환기해보자.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비류의 아버지 우태는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여기서 '서손(庶孫)'은 직계 자손이 아니라는 뜻이다. 전승의 계보상으로 보면 해부루의 아들은 금와왕뿐이니, 우태는 금와왕의 일곱 아들 중 한 사람으로 대소왕의 동생쯤으로 보아도 좋겠다. 이 우태가 졸본 출신 소서노와 혼인했으니, 아마도 혼인을 계기로 동부여에서 졸본 땅으로 일찍 이주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비록 그 소생 비류와 온조가 소서노와 함께 남하해 백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우태 때에는 졸본에서 유력한 세력을 이루었을 것이다. 졸본이 고구려의 건국지였으니, 주몽 이전에 동부여 출신이 나라의 기반을 이룬 셈이었다.

 

이렇게 전승상으로 보면, 다수의 동부여 출신이 고구려로 이주했다. 주몽, 유리는 물론 우태, 부여왕종제, 갈사국왕 등 해부루의 계보를 잇는 동부여 왕실 인물도 포함된다. 이들은 주몽, 유리는 고구려 왕실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갈사국왕의 손녀는 대무신왕의 차비(次妃)가 되었고 부여왕종제 등도 역시 고구려의 유력한 세력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