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 소련군 공격에 무너진 관동군 >

엑칼쌤 2024. 1. 27. 17:34

소련군 공격에 무너진 관동군

 

* 관동군 포로 60만, 붉은 군대의 압도적 승리

 

일본과 소련은 1941년 4월13일 일·소 중립조약을 맺었었다. 미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여긴 일본이 북방쪽 안보 걱정을 덜려는 심산에서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관동군의 위협을 신경쓰지 않고 독일과의 전쟁에 전념할 수 있어 좋았다. 일반적으로 어느 조약이든 서로에게 이득이 될 때는 지켜지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깨지기 마련이다. 소련이 1945년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중립조약은 깨졌다.

 

8월9일 새벽 소련군은 병력 150만, 탱크 5500대, 비행기 5000대를 동원해 그야말로 물밀 듯이 관동군을 밀어붙였다. 지휘관은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대장이었다.관동군의 주력은 중국 본토로 또는 태평양전선과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해 많이 빠져나갔기에, 러시아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소련군 침공 열흘 뒤(8월19일)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소련군에게 공식 항복했다. 관동군 71만 병력 가운데 전사자는 8만에 이르렀고, 시베리아로 끌려간 포로 60만 가운데 6만4000명이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죽었다(호사카 마샤야스, <쇼와 육군>, 글항아리, 2016, 1055쪽 참조).

 

물론 소련군도 손실이 없진 않았다(소련군 1만2301명, 소련군과 함께 관동군을 공격했던 몽골인민공화국 군인 72명). 이런 손실은 전체 작전 참가병력의 0.7%로, 독일군과 맞서 싸웠던 유럽전선에서 소련군이 입었던 손실(전사 및 실종 760만, 포로 520만, 수감 중 사망포로 260만)에 견주어보면 '거의 손실이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붉은 군대의 압도적 승리였다(폴 콜리어, <제2차 세계대전>, 플래닛미디어, 2008, 689쪽 참조).

* "731 드러나면 히로히토에게 누 된다"

 

소련군의 기습공격으로 관동군이 급속하게 무너지면서 731부대의 전쟁범죄 증거들을 없애고 도망치기에 바쁘게 됐다. 소련군의 침공 당일(8월9일)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관동군사령부에게 731부대를 다른 부대들보다 앞당겨 철수시키라는 전보를 보냈다. 관동군사령부는 이시이에게 '직접 사령부에 와서 명령을 접수하라'고 알렸다.

 

그때 이시이는 본부(하얼빈 외곽의 핑팡 지역)에 없었다. 세균무기로 갖고 사쿠라 특공대와 함께 지린성 통화(通化)지역에 가 있었다. 이시이의 부관이 급히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으로 달려가 받아본 명령 문안은 '731부대는 정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잡히지 말고 서둘러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도쿄의 일본 육군 지도부가 731부대의 전쟁범죄가 문제될 것을 얼마나 걱정했을까를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아사에다 시게하루(朝枝繁春) 육군 참모와 관련된 이야기다. 아사에다 참모가 훗날 남긴 회고담에 따르면, 8월9일 관동군으로부터 소련군 침공 소식을 듣자말자, 731부대를 떠올렸다. '731부대의 세균전 실태가 드러나면 히로히토 국왕에게 누가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참모들과 상의 끝에 육군 참모총장의 명의로 이시이 시로에게 신징 군용비행장에서 대기하라는 전보를 쳤다.

 

* 참모총장 훈령, "증거 다 없애고 빠져나오라"

 

8월10일(일설에는 8월11일)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비행장 격납고에서 이시이-아사에다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시이를 보자말자 아사에다의 첫마디는 '마루타는 몇 명 남았는가요'였다. 1시간 가량의 만남에서 아사에다는 731부대 철수와 관련한 육군 참모총장의 훈령을 이시이에게 전했다.

 

[1. 귀부대는 전면적으로 해소(解消)하고, 부대원은 한시라도 빨리 일본 본토로 귀국시키고, 일체의 증거물건은 영구히 지구상에서 없앨 것. 2. 이를 위해 공병 1개 중대와 폭약 5톤을 귀부대에 배속하도록 이미 수배를 마친 상태이므로, 귀부대의 제반 설비를 폭파할 것. 3. 건물 안의 마루타는 전동기로 죽인 뒤 귀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하고, 그 재를 송화강에다 흘려보낼 것. 4. 세균학 박사학위를 지닌 귀부대 군의관 53명은 귀부대의 군용기로 일본으로 곧바로 송환할 것. 그 밖의 직원과 부녀자, 아이들은 만주철도로 다렌(大連)까지 먼저 수송한 다음 내지(內地, 일본)로 송환할 것](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173-174쪽).

 

위 훈령문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731부대의 전쟁범죄 증거들을 모두 없애고 빨리 그곳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이시이로선 그동안 애써 모은 세균전 자료를 폐기하라는 명령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얘기를 마치고 돌아서던 아사에다를 불러 세우고 이렇게 물었다. "(세균전) 연구 자료만이라도 갖고 돌아가면 안 될까요?" 아사에다의 회고담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해 "아니, 안 돼!"라는 반말 투의 단호한 대꾸를 했다고 한다.

 

(이시이는 당시 53세, 아사에다는 33살로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났고 계급 차이도 컸다. '일체의 증거를 없애라'는 참모총장의 훈령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느라 말이 저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아사에다의 언행에서 당시 엘리트 의식으로 우쭐해 거만을 떨었던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기세등등했던 분위기가 묻어난다. 하지만 이시이는 훈령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독립투사를 비롯한 많은 '마루타'를 희생시키며 만들어낸 피 묻은 세균전 자료를 더러운 거래수단으로 썼다).

 

* 칼 빼든 이시이, "731 비밀, 무덤까지 가져가라"

 

하얼빈 외곽의 731부대 본부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일본군 병사는 선임들로부터 '무엇이나 함부로 엿보거나, 말하거나, 엿들으면 안 된다'는 세 가지 부대훈(訓)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핑팡으로 돌아온 이시이는 곧 모든 부대원들을 불러 모아놓고 철수 방침을 알리며 이렇게 큰소리로 말했다.

 

"731의 비밀을 어디까지나 지켜주기 바란다. 만약 군사기밀을 누설한 자가 있다면, 이 이시이가 그 비밀을 지껄인 자를 어디까지든 추적할 것이다. 첫째,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731부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숨길 것이고, 둘째, 어떠한 공직도 맡지 말며, 셋째, 대원들끼리의 연락도 엄금한다. 731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라"(靑木富貴子, 176-177쪽).

 

일본 군도를 빼들어 흔들며 이시이는 (전쟁범죄로 얼룩진) 731부대의 기밀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이 외쳤다. 그런 살벌한 이시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대원들은 귀기(鬼氣)를 느꼈다고 한다.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일본으로 돌아가면 731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실제로 일부 대원은 이시이 부대장의 말대로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고 군인 연금조차 신청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다).

 

* 세 곳의 소각로에서 타오르는 연기

 

흔히 731부대를 '731 세균부대'라 일컫는다. 731부대의 죄악상에서 페스트를 비롯한 세균의 비중이 워낙 크기에 그렇게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세균무기 개발에 미친 듯이 관심을 쏟았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균 하나에 매달린 것은 아니다. 세균실험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여러 생체실험을 했다. 따라서 '731부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731부대는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독가스 무기를 쓸 요량으로 독가스 실험도 했다. 이를 위해 지은 건물은 바로 옆의 가스저장실과 함께 (둘 다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로) 지금도 남아있다. 독가스 실험장으로 내몰린 '마루타'들은 이미 세균실험을 비롯한 여러 가학적인 생체실험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기진맥진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독가스 실험장은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이었다. 그렇게 죽은 이들은 소각로로 보내졌다.

 

731부대는 모두 세 곳의 소각로를 운용했다. 나치 독일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독가스 실을 운용하면서 '최종 해법'(Endlösung)이란 용어를 썼다. 그 단어를 여기에 빌리자면, 731부대가 세 곳의 소각로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최종 처리'해야 할 '마루타'와 세균무기 개발과정에서 태워 없애야 할 각종 생체실험 장비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련군의 침공을 맞아 731부대가 서둘러 철수하는 마지막 날, 소각로 굴뚝의 시커먼 연기가 더욱 세차게 솟아올랐다. 평소라면 소각로는 생체실험 과정에서 생기는 피 묻은 옷가지 또는 세균에 오염된 장갑이나 실험 장비들, 그리고 죽은 마루타들을 태우는 용도로 썼다. 그렇지만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는 무렵엔 다른 것들이 태워졌다. 생체실험과 관련된 각종 표본과 세균 배양 도구들, 그리고 엄청난 양의 각종 문서들이 소각로의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 '최후의 마루타', 독가스로 죽여 불태워

 

731부대의 7동과 8동 감옥에 갇혀 있던 '최후의 마루타' 숫자는 40명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그 '마루타'들은 어떻게 '최종 처리'됐을까. 일본 육군 참모총장이 731부대 철수와 관련해 전보로 보낸 훈령에는 '마루타는 전동기로 죽인 뒤 귀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하고, 그 재를 송화강에다 흘려보낼 것'으로 쓰여 있었다. '전동기'라면 전기충격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가스(청산액화 가스)로 죽였다.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는 <悪魔の飽食>(角川文庫, 1983)에서 그때의 참상을 지켜봤던 731부대원의 증언을 이렇게 옮겼다.

 

[마루타 가운데 몇몇은 독가스로는 아직 죽지 못해 강철로 된 문을 두들기며 끔찍한 소리를 내고 목을 쥐어뜯으면서 몸부림쳤다. 죽은 마루타들의 다리를 잡아끌어 7동 옆에 파두었던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가솔린과 중유를 퍼붓고는 불을 붙였다. 8월11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루타의 시체는 좀처럼 타지 않았고 철수는 시각을 다투었다. 도망치기에 정신이 없었기에 시체 소각작업 중 그대로 흙으로 덮어버렸다](森村誠一, <악마의 731부대와 마루타>, 고려문학사, 1989, 128쪽).

 

'마루타'들을 모두 죽이고 불태우긴 했지만, 서둘러 도망치느라 그 재를 송화강에 뿌리라는 훈령을 따르진 않았다. 곧이어 부대 건물들이 폭파돼 무너졌다. 의심이 많고 꼼꼼한 성격을 지닌 이시이는 약제 담당 소좌가 모는 경비행기에 올라타 731부대의 파괴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사진에 담았다. 그런 뒤 다렌의 731부대 출장소에 들러 필름 현상을 맡겼다.

 

오늘날 전해지는 731부대의 흑백 기록 사진들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80여 년 전 그곳에서 가학적인 생체실험을 받다 숨져간 '마루타' 원혼들의 눈물이 사진에서 배어나오는 듯하다. 워낙 철근 콘크리트 두께가 두꺼워 폭파되지 않은 동력반 보일러실의 거대한 굴뚝 2개도 눈길을 끈다. 8월17일 소련군이 핑팡의 731부대를 접수했을 때 남은 것은 파괴된 건물 잔해였다. 무너진 건물 사이로 페스트 벼룩을 지닌 쥐들이 떼 지어 다닐 뿐이었다(일본군이 풀어놓고 간 페스트 쥐는 큰 피해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