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전성(塼城)
강화군 불은면 오두돈대 아래 축조된 강화전성은 강화외성의 25km 토성 중 해안 쪽이다. 영조 19년(1743)강화지역 방위를 맡은 유수 김시혁이 고려 때 쌓은 토성이 유실되자 조정에 건의해 벽돌로 쌓았다. 하지만 당시 성벽위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 그루의 나무가 세월이 흐르면서 거목이 돼 그 뿌리가 성벽을 뚫어 파괴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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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뿌리가 성벽을 파괴시키고 있다. |
강화군에서 최근 270m 정도 복원했지만 나무로 인해 훼손된 성벽은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다. 성벽 멸실의 주범인 나무를 베어내야 하는데 워낙 거목이라 엄두가 나질 않는 모양이다.
강화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까지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이다. 특히 고려왕조는 몽고의 침입으로 개성을 포기하고 강화로 수도를 옮겨 39년간 피신했던 곳이다.
당시 고종(1233년)은 몽고에 대비해 바닷가 적북 돈대부터 초지진까지 23㎞에 걸쳐 토성을 쌓았다. 조선시대 때도 유사시 국왕의 피신처로 강화도에 산성을 축조했다. 강화는 국내서 관방유적의 총집결지인 셈이다. 각 시대별 성곽 축성기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강화에 있다.
강화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까지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이다. 특히 고려왕조는 몽고의 침입으로 개성을 포기하고 강화로 수도를 옮겨 39년간 피신했던 곳이다.
당시 고종(1233년)은 몽고에 대비해 바닷가 적북 돈대부터 초지진까지 23㎞에 걸쳐 토성을 쌓았다. 조선시대 때도 유사시 국왕의 피신처로 강화도에 산성을 축조했다. 강화는 국내서 관방유적의 총집결지인 셈이다. 각 시대별 성곽 축성기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강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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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한 포구에 인접한 강화전성 |
북쪽으로는 적북돈대에서 해안가를 따라 휴암돈· 월곶돈· 제승돈· 염주돈· 갑곶
돈대·등 54개 돈대와 정족산성 등 14개소의 성곽이 이 작은 섬에 산재해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 벽돌을 사용한 성벽이 곳곳에 등장했다. 그때 개축한 성벽이 오두돈대 주변에 잔존해있어 수원화성과 더불어 전돌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강화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집권자들이 유사시에 피신해 도성으로서 사용하기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왕권을 보호하기위해 내륙에서 강화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는 길은 성곽을 쌓는 길밖에 없었다. 1차 방어로는 육지의 김포 문수산성, 2차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강화외성이었다.
특히 조선후기에 벽돌을 사용한 성벽이 곳곳에 등장했다. 그때 개축한 성벽이 오두돈대 주변에 잔존해있어 수원화성과 더불어 전돌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강화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집권자들이 유사시에 피신해 도성으로서 사용하기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왕권을 보호하기위해 내륙에서 강화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는 길은 성곽을 쌓는 길밖에 없었다. 1차 방어로는 육지의 김포 문수산성, 2차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강화외성이었다.
강화전성 안쪽에 자동차를 세 을 수 있는 넓은 마당도 있다. 납작한 전돌로 쌓은
성벽이 한옥 집 꽃 담장같이 예쁘다. 성벽 앞은 작은 포구다. 잔잔한 바닷물이 성벽 인근에서 맴돌고 있어 하루 봄나들이로 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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