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

< 김일성 시대 수많은 '희생양' >

엑칼쌤 2013. 12. 10. 21:45

김일성 시대 수많은 '희생양'

 


김일성은 1인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정치적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해방 직후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조선공산당을 설립한 김 주석은 1949년 6월 중국에서 활동했던 '연안파' 중심의 조선신민당, 남로당 등을 통합해 조선노동당을 창설하고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노동당의 1인자가 됐지만, 지지기반이 약했던 김 주석은 1인 지배체제 확립에 반대하는 각 계파를 단번에 숙청하지 않고 하나씩 제거했다.

김 주석은 우선 6·25 남침 실패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1955년까지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 간부들을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남로당 계열 제거에 앞장섰던 인물은 '소련파' 박창옥 전 내각 부수상이다. 그는 김 주석을 위해 같은 계파인 허가이 숙청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박창옥은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와 손잡고 김 주석의 독주에 정면으로 도전하다가 '반당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토사구팽' 당했다.

이후 김 주석은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연안파와 소련파는 물론 오기섭 등 국내파까지 모조리 제거했다.

1960년대 들어 노동당 내에는 김 주석의 친위부대인 '빨치산파'와 '갑산파'만이 남게 됐다. 당시 노동당 내 2인자였던 박금철과 리효순 등 갑산파는 김 주석과 연계해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인물들이지만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다 종파분자로 몰려 1967년 숙청됐다.

갑산파 숙청을 끝으로 노동당 내에서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한 김 주석은 1969년에는 김창봉 민족보위상(국방장관에 해당), 허봉학 군 총정치국장 등 군부의 실세들을 '수령의 권위 도전'과 '군벌주의'라는 죄목으로 제거했다.

 

 

< 김일성-연안파, 갑산파 >

 

 

김일성은 1956년 8월 당시 '연안파'(중국 혁명 참가파)의 거두였던 최창익, 김두봉,

소련파를 이끌던 박창옥 등이 "종파 활동을 했다"며 완전히 숙청했다. 이 '8월의 종파사건'을 거치며 김일성은 단일체제 구축을 완성하게 된다.

 

이어 10여 년 뒤인 1967년 김일성은 자신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던 세력인

'갑산파'를 숙청함으로써 김일성 유일 체제를 구축한다. 이들에게는 수정주의, 반당(反黨) 등의 딱지가 붙었지만, 결국 김일성 유일지도체제 구축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에

숙청된 것이다.

 

< 연안파 >

 

 

주요인물로는 김두봉·최창익·무정·박일우·한빈·윤공흠·서휘 등이 있다. 이들은 일제 때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1942년 7월 산시성[山西省]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하던 자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국공(國共) 내전에 참전했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1945년 11월부터 그해말에 걸쳐 입국했다.

 

그리고 1946년 2월 16일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해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당수 김두봉)을 결성했다. 조선신민당은 1946년 8월말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출범했으며, 이때 연안파 인물들은 북한 정치의 장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연안파는 6·25전쟁 이후 북한 사회주의건설의 노선을 둘러싸고 김일성 중심의 지도집단과 대립하다가 결국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대부분 당에서 축출되거나 숙청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