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미르 분쟁'의 씨앗을 뿌린 '영국'
미얀마의 로힝야족 분쟁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영국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가 만들어 놓은 비극 중 하나였다. 18세기 말부터 인도 전역을 무력통치했던 영국총독부는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인도를 떠나면서 인도-파키스탄의 분할 독립문제라는 거대한 핵을 떨어뜨리고 나갔다. 카슈미르 분쟁은 이 분할 독립문제에 따라 연쇄적으로 일어난 전쟁 중 하나였다.
영국은 본래 인도 내 세력을 확장하고, 통치하는 내내 인도의 종교분쟁 문제를 이용했다. 17세기 동인도회사의 인도 식민지 운영 때부터 시작된 분할통치의 기술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완성됐다. 이 악명높은 분할통치술은 인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영국의 식민지로 퍼져나갔고, 영국의 충실한 제자였던 아시아 국가, 일본으로도 수출됐다. 한국의 동서문제, 지역감정 역시 이 분할통치 기술을 배워온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국의 식민통치기가 길어지면서 인도 내 힌두-이슬람 간 대립각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2차대전이 종전될 무렵 인도 내의 이슬람연맹의 세력은 막대해졌고, 분할 독립논의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령 인도제국은 1947년 8월15일, 인도와 파키스탄,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일대의 동파키스탄 3국으로 분할 독립됐다. 2차대전 종전 후 인도로 귀환했던 250만명에 이르는 영국령 인도군 병력 또한 신생국 인도의 힘을 약화시키려던 영국의 의도대로 쪼개졌다.
문제는 영국 지배기간 동안에도 별다른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느슨한 통치가 이어지던 카슈미르 지역, 즉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의 분할 문제였다. 영국은 이 지역의 분할 문제를 인도 쪽에 떠넘기고 나가버렸다. 이 지역은 번왕국을 통치하고 있던 왕족들과 지배계층은 힌두교도였지만, 주민 상당수는 이슬람교인이었다. 결국 잠무 카슈미르 번왕은 인도 자치령에 편입되기로 결정했지만, 곧바로 이슬람교 주민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파키스탄이 여기에 개입하면서 1차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불씨로 이어졌다. 건국 4개월만에 두 나라가 맞붙자 국제연합(UN)이 중재에 나섰고, 북서부 아자드 카슈미르 지역이 파키스탄령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후 1962년, 중국이 동부 아크사이친 지역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중국과 인도간 분쟁이 벌어져 이 지역이 중국 영토로 뜯겨져 나가면서 오늘날 카슈미르 지역의 국경이 대략적으로 만들어졌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3차에 걸쳐 전쟁을 치렀고, 이 지역주민들은 국지전이 벌어질 때마다 수십명씩 사망자가 발생하고 마을에 폭탄이 떨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더군다나 인도정부는 이 지역에서 강력한 군정을 펼치면서 폭압적인 통치를 이어나갔다. 1988년 카슈미르에서 인도의 폭압적 통치에 반기를 든 민중 반란이 일어나자 8만여명을 학살했다.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던 산골마을인 카슈미르는 영국이 뿌린 분쟁의 씨앗으로 인해 늘 핵전쟁 위험을 이고 살아야 하는 아시아의 화약고로 변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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