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정부

< 여순반란사건 >

엑칼쌤 2021. 6. 29. 17:02

여순반란사건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들이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과 38°선을 철폐하고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명분으로 제주 4·3사태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순천 등지까지 무력점거를 확산시킨 사건이다.

 

* 배경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제주 4·3사태가 확산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다. 이에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 전개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14연대의 군인 일부가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전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선동과 위협으로 반란군에 동참하게 했다. 이들은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곧바로 벌교·보성·고흥·광양·구례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했다.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했다.

 

초기 진압작전에서 반란군에 밀린 이승만 정부는 20일 열린 미국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21일, 여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사흘간의 교전 끝에 이들 정부군은 25일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 경비정 등을 동원해 여수를 포위해나갔고, 27일 진압에 성공했다. 여수를 빠져나간 반란군은 지리산 인근으로 흩어져 11월부터 1950년 초까지 게릴라로 활동했다.

 

* 결과

 

비록 미군의 협조로 진압에는 성공했으나 이 사건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신생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확인된 사망자는 3,400여 명이며, 행방불명자는 800여 명, 추정 사망자는 1만 여 명으로 밝혀졌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각계각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정,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시켰다. 또한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 좌익계와 광복군계를 포함한 모든 반이승만 성향의 군인을 제거해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이 사건 이후 대한군사지원을 훨씬 강화했고 주한미군철수를 1949년 6월로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