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 선조의 등극, 사림들의 세상이 오다 >

엑칼쌤 2021. 9. 22. 11:41

선조의 등극, 사림들의 세상이 오다

 

4대 사화의 긴 소용돌이를 지나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1552~1608)가 등극한다. 선조의 등극은 본격적인 사림 시대가 전개되는 것을 의미한다. 4대 사화 속에서 사림들은 막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림들은 다음

시대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을사사화를 일으킨 소윤의 윤원형이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면서 훈구파의 시대는 끝나게 된다. 이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던 훈구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온전히 권력을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사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미암 유희춘이었다. 유희춘은 그동안 함경도 종성에서 긴 유배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선조가 등극하고 얼마 후였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6세에 왕위에 오른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적자나 적손이 아닌 방계에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왕이기도 하다. 선조에 대한 평가는 여러 면에서 엇갈리고 있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임진왜란과 같은 큰 변란이 일어나 그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 문치주의자 선조의 등극

 

선조는 사림들에 대한 복권을 통해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하여 사림 시대를 열게 한 왕이라 할 수 있다. 선조는 재위 초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증직하고 그에게 피해를 입힌 남곤의 관직을 추탈하였다.

 

그리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의 공적을 삭탈하는 등 사림들의 지위를 확립시켜줬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겨 극진히 대우하였다.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고 한다.

 

선조는 즉위 초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를 섭렵하였다. 유희춘이 경연관으로 선조의 깊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신봉자로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 시기 이황과 이이를 비롯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이들이 등장하여 활동하고 성리학을 통한 유학의 장려 등 학문의 진흥에 힘쓴 것은 문치주의의 깃발을 들었던 그의 역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유희춘의 관직 복귀와 <미암일기> 저술

 

유희춘의 <미암일기>가 쓰여진 것은 1567년부터 1577년까지 약 11년간에 걸친 시기였다. 선조가 등극한 해인 1567년부터 그의 재위 기간에 쓰여졌다. 이처럼 <미암일기>는 사림시대를 연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미암일기>는 선조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1567년 7월 명종의 대를 이어 선조가 등극하고 이해 10월 14일 미암은 유배에서 풀려나 경연관으로 차출된다. 관직에 다시 복귀한 것이다. 이날은 미암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암은 이 소식을 부인 송덕봉이 살고 있는 담양을 비롯 고향 해남의 일가에도 알린다. 해남의 성주 김응인은 축하를 보내왔고 여러 가지 선물까지 보낸다.

 

미암이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한 것은 다시 중앙정치의 실세로 등용된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중앙정치에 복귀함으로 인해 그와 연계 되어 있는 인물, 인척들과의 교유가 숨가쁘게 전개된다. 유희춘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는 해남윤씨는 물론 오랫동안 해남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해남의 성주는 적극적으로 미암을 돕는다. 현실적인 권력 앞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미암은 유배지에서 성리학에 정진하여 경전에 능하였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여 경연관으로 활동하는 동안 선조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는다. 선조는 항상 이르기를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했다.

 

유희춘은 선조 즉위년인 1567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감사,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그중 홍문관부제학에는 여덟 번이나 임명되어 선조 초기의 학문연구, 시강참여, 언론형성 등을 주도하였다.

 

또한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많은 편찬에 참여하고 저술도 남겼다. 홍문관을 이끌면서 <육서부주> <국조유선록> <헌근록> 등을 편찬하였고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간행 보급하도록 건의하는 등 주자학 확산에 힘썼다. 이와 함께 외조부 금남최부의 <금남집>과 <표해록>을 간행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주자학자로서의 면모를 마음껏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의 문치주의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동안 고단한 긴 유배의 시간에서 벗어나 사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