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안을 지켜준 강화도 '돈대'
돈대는(墩臺)는 주변을 잘 관측할 수 있도록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땅에 설치한 소규모 군사 기지를 말한다.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접경지역 또는 해안 지역에 주로 만들었다.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에 돈대 2개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1796년(정조 20년)에 축성된 수원 성곽에는 3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다.
이곳엔 무려 54개의 돈대가 있다. 조선 숙종 5년에 48개의 돈대를 만들었고 그 후로도 계속 쌓아서 모두 54개의 돈대가 강화를 호위하고 있다.
강화도의 경우 해안가 툭 튀어나온 언덕에 돈대가 주로 있는데, 주변 관측과 방비에 유리한 지형에 설치한다는 돈대의 목적상 해안가 언덕은 최고의 적지였음이 분명하다. 이것으로 봤을 때 강화는 과연 돈대의 고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강화도의 해안선 둘레는 약 100여 킬로미터인데, 2킬로미터마다 돈대가 하나씩 있는 꼴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많은 돈대를 강화도에 만들었던 걸까. 342년 전인 숙종 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숙종은 14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는 아직 나라가 병자호란의 침탈로부터 회복되지 않았을 때였다. 청나라가 쳐들어와서 조선의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살육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라의 형편은 어렵기만 했고 주변 정세 역시 어지러웠다.
숙종은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을 주문했다. 영의정 허적의 청을 받아들여 강화도에 돈대를 쌓도록 결정했다. 그해(1678년) 10월에 병조판서 김석주를 강화도에 보내 돈대를 쌓기에 알맞은 장소를 살피게 하고 11월 4일에 강화 돈대 설치 시행 지침을 담은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을 반포한다.
김석주가 올린 후록(後錄)에 보면 돈대의 형태와 규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돈대의 수를 49개소로 정하고 돈대의 제도는 산이 있는 곳은 산을 따라 성첩(城堞)을 만들며, 평지에 성을 쌓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높이를 3장(丈)으로 하고, 그 두께의 밑넓이는 3장 5척으로 하며, 면(面)의 넓이를 2장 5척으로 한다. 치첩은 높이 6척, 두께 3척, 길이 9척으로 하고 전면에 포혈(砲穴) 2개소, 좌우에 포혈 각 1개소로 하고, 주위를 4면 10칸(間) 기준으로 하되 그 지형에 따라 방형(方形) 또는 원형, 일직선 또는 ㄷ 자형으로 하며 파수병이 많아야 할 긴요한 지역의 경우는 성의 제도를 알맞게 크게 한다.'
1678년 음력 12월 1일, 강화도에 돌을 다루는 석수(石手)들이 들어온다. 돈대를 쌓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석재(石材)가 필요하다. 다행히 강화도와 인근 섬의 산에는 바위가 많아 돌 공급에는 큰 애로사항이 없었다.
돌을 쪼개고 운반하는 팀이 강화도로 들어왔다. <비변사등록>에서 보면 석수가 400여 명, 대장장이가 50여 명에다 그들을 돕는 일꾼들까지 해서 총 1400여 명이 강화도로 왔다. 또 쪼갠 돌을 실어 나르는 배도 75척이나 투입되었다. 각각의 배를 모는 사공과 사공을 돕는 격군 2명씩 해서 모두 220여 명의 사람들도 같이 왔다. 돈대 쌓기에 앞서 돌을 깨고 나르는 데 만도 1600명 이상의 사람이 강화로 와서 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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