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용장산성
강화도로 밀려난 고려 무신정권의 군인이자 경찰조직이었던 삼별초(三別抄)가 고려왕 원종이 원나라에 굴복해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을 반대하며, 원종 11년인 1270년 배중손(裵仲孫) 장군의 지휘로 군사와 민초들을 이끌고 강도 외포리를 떠나 두 달 만에 진도로 들어왔다. 섬의 북동쪽에 위치한 용장산성에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고 제주도로 쫓겨가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결사항전을 했던 곳이다. 널찍하게 남아 있는 성의 흔적에 삼별초들의 허망한 항몽의 꿈이 배어 있다.
삼별초는 강화를 떠나올 때 급히 움직였을 것이다. 원나라 군대가 강화에 들어오면 신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었을 터. 기록에 따르면 1,0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서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와 9개월 정도 머물렀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필요했을 것이지만, 경황 없는 피란 과정에서 반듯한 건물들을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기둥자리나 정연한 배치 구도, 엄청난 기와의 양과 막새기와에서 보이는 고구려 계승 정신 등을 보면 짧은 기간에 만들어진 왕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용장성은 삼별초 항쟁을 넘어 미래의 도성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발굴에서 드러난 명문기와나 다른 유물들의 시대도 13세기 초, 즉 한 세대 전을 말하고 있다.
진도는 고려 무신정권의 권력자였던 최항(崔沆)이 스님으로 있었던 곳이다. 원종10년, 즉 몽골항복 직전인 1269년 남해에 있던 국사(國史,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책)를 진도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용장성도 무신정권 마지막 단계의 권력자인 임준 등이 천도를 준비하면서 보완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강화에서 견디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흔적일 것이다. 강화나 진도 모두 세운선들이 바닷길로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이고, 진도는 개경에서 멀고 해류가 급해 접근이 어려우니 방어에 용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또 다른 무인정권인 삼별초가 그 궁을 접수해 사용하게 되었으니 실패하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이 적중한 셈이다.
삼별초가 려몽연합군에 의해 격멸된 후 진도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몽골로 끌려갔다고 전한다.
삼별초의 최후는 제주도에서 맞이하지만 사실 왕조는 진도에서 끝이 났다. 왕으로 옹립한 승화후 온(承化侯 溫, ?~1271)이 진도에서 참살당했기 때문이다. 용장궁의 남쪽, 진도군청에서 운림산방 가는 길 고개마루의 바로 아래 그의 묘가 있다. 묘 앞 돌계단마다 그의 처절한 죽음을 애도하듯 동백꽃이 다시 피고 있다.
배중손과 삼별초는 조선이 편찬한 고려사에선 반란군으로 평가되지만, 오늘날에는 처절한 항몽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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